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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Sep 13. 2020

아버지와 함께 한 한여름밤의 꿈

{나의 아버지-내가 존재하는 이유}


남수의 몸이 뜨거웠다. 흡사 무슨 중병이라도 걸린게 틀림없다. 다리가 힘이 풀리고 탁하고 쓰러졌는데

일어날 수가 없다. 그냥 누웠다. 나의 꿈속에서는 어머니가 진수를 부르고 있었다. 아련하지만 그 기억을 끝으로 까마득하게 어둠으로 빨려들었다. 진수는 땅바닥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단잠에 빠졌다.     


그렇게 길에서 한잠을 자고 일어나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집집마다 밥을 짓느라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고 떠들썩하던 소리도 잠잠해졌다. 서둘러야했다. 아직도 5리 밖에는 안 걸었는데 앞으로도 5리가 남았다. 오래 신어 닳고 닳은 고무신을 신고 울퉁불퉁한 흙길을 걷는 건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발은 아프지만 잠깐 자면서 햇빛아래 땀이 났고 몸이 개운해진 것 같았다. 다행이 중병이 아니였나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남수 곁을 지켜준 벌레들과 황금색 해바라기를 뒤로 한 채 급히 서둘렀다.   

 

남수는 임실 중앙중학교 1학년 학생이였다. 언제 다 자랄지 모르는 커다란 교복을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었으며 푸르스름한 머릿속이 다 보일 정도로 까까머리였다. 아직 키가 작고 덜 자란 티가 났다. 머리는 한번도 까까머리보다 더 길러 본 적이 없고 주변에 사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잔소리로 매일 씻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말끔하였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검정 주머니를 허리에 둘렀고 그 안에는 교과서와 하얀 운동화와 도시락이 뒤죽박죽 들어있다. 하얀 운동화는 혹시나 닳아질까봐 학교에서만 신고 가방에 얼른 넣고 검정고무신으로 바꿔 신었다.

   

임실역에서 가까운 두곡리 고씨네 다섯 남매 중 막내아들이었다. 고씨는 동네에서 잘 사는 축에 들지만 더 많은 재산을 모르기 위해 아끼고 또 아낀다. 흰 운동화도 일년에 단 한 켤레만 허용되고 닳아지거나 잃어버려도 절대로 사주지 않는다. 검정고무신은 쉽게 찢겨지는 데 그런 날은 가차 없이 혼을 낸었다.    

남수는 아버지가 무섭다. 혼이 나지 않기 위해 눈치껏 일을 하지만 혼이 나는 일이 다반사이다. 호되게 혼이 날 때면 엄마에게 달려가지만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남수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시다가 말없이 찬장 깊숙이 있는 엿을 챙겨서 주셨다. 엿을 먹으면서 보이지 않은 어머니의 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어머니와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시는 아버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자랐으나 다른 형들은 더 많이 혼이 났기 때문에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형들은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아끼시는 것처럼 보이는 막내 동생 남수를 부러워했다.

    

이 날도 해가 일어나기도 전에 일어나 산에 가서 소 먹일 풀을 베어 와서 죽을 끓여놓았다. 학교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였다.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꾀를 부린다는 건 어림도 없다. 학교에 가기 전에 진이 다 빠졌다. 국민학교는 집에서 가까워서 좋았는데 중학교는 걸어서 10리(3.9km)를 가야했다. 산도 넘어야하고 들도 지나야하고 개울도 지나야하며 조그만 발로 검정고무신을 신고 열심히 걸어야했다. 2시간 가까이 걸어 학교에 가면 또 지치지만 봄도 지나고 여름도 지나면서 몇 개월을 걸었다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함께 걸어가기고 하고 혼자 걸어가기도 했다. 사정이 좀 좋은 친구들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런 친구들은 운이 좋다. 부럽다. 나도 버스를 타고 가고 싶지만 오늘도 신발을 버스삼아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세월이 흘러 까까머리 남수는 노년기에 접어 들었다. 그의 딸은 어느새 노년의 아버지를 이해할 만큼의 나이가 되었고 까까머리 남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졌다.

딸은 까까머리 중학생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는 마음으로 함께 가는 길은 친구도 되어주고 아플 때 지켜주기도 했다. 어느새 아버지와 친구가 되어 있었다. 딸과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시간이었고 처음으로 10리를 걸어야 해서 다리가 아팠지만 행복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다가온 시간들은 아버지의 힘든 어린 시절의 아련한 마음이 딸에게 전해지는 시간들이었으며 딸이 좀 더 철이 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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