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거리는 털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코 끝은 반짝이며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는 기품 있는 검은 별이 담겨있다. 눈 잎에 보이는 나무 책상다리처럼 길고 멋진 다리를 가졌으며 가운데 가르마를 단정히 빗어 내린 단발머리 같은 귀가 붙어 있다. 마냥 편안해 보이고 나른함 가운데 있다. 이 넓은 공간의 주인은 바로 강아지처럼 익숙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나가다 오랜만에 들어온 초원 사진관 옆 <8월의 크리스마스> 카페.
중년의 사장님은 단정하고 미소가 귀여운 분이시다.
손님이 없으신 잠깐의 찰나에 내 옆자리에서 강아지를 쓰다듬고 계신다.
"강아지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이름이 얼핏 들으니 보리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맞나요?
"네"
"저희 집 강아지는 봄이에요." 갑자기 통성명을 한다. 서로의 이름은 궁금하지는 않지만 강아지의 이름은 궁금하다.
"무슨 종인가요?"
"푸들이에요" "제가 아는 푸들 치고는 꽤 큰데요. 이런 강아지는 처음 봐요."
"우리가 흔히 보는 작은 푸들은 미국 종으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키우는데 보리는 유럽종으로 흔하지 않아요."
나름 족보가 있어 보인다. 유럽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프랑스 어느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니 어디선가 본 듯하다.
"굉장히 얌전하네요."
"꼭 사람 같아요. 말도 얼마나 잘 듣고 웬만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보리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한참을 하시고 그다음에는 그전에 키웠던 강아지 얘기이며 그 강아지가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연들을 얘기히신다
때론 억울함을 호소하고 때론 그리움을, 강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시며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셨다.
사람보다 낫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게 느껴져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때때로 우리 집 봄이를 그렇게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강아지로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밤을 새워도 모잘 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강아지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의 고향이며 서로의 이름은 묻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통성명은 많이 사라졌다. 깊이 있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 한다. 자칫 잘 못 하면 내가 아는 사람으로 분명 연결이 될 수 있으니 학교며 고향 이야기는 되도록 피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살아온 행적이 나름 별다르지 않고 크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가 나에 대해 상세하게 아는 것이 점점 불편하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일까? 나 말고 누구나 그럴까?
또한 내가 잘못을 안 했어도 우리의 가족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랄때가 있다. 제발 그 사람 이야기만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 사람과는 다른데, 같은 사람으로 본다거나 그 사람의 과오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릴 때 나는 아버지가 농사짓는 것이 정말 창피했다.
친구들이 물어보면 "응. 뭐. 일해."라고 했고 될 수 있으면 밝히지 않으려 했고 학교에서 부모님의 직업을 쓸 때도 친구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었다. 농사는 가난의 상징이었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처럼 느껴졌었다. 깨끗한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부러웠었다.
나는 왜 그때는 몰랐을까?
내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내가 회사원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부모가 아닌 부모로 투영되는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 스스로가 세상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오후의 햇살 가운데 여유 있게 앉아 있는 강아지는
오히려 내가 부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들이었던 것이다.
고귀하고 기품 있으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으며 소위 있어 보이는 사람.
나도 나 스스로의 기품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선택할 수 있다. 내가 가진 환경에 불평을 갖고 나 스스로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거나 내가 처한 환경을 인정하고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스스로 빛이 날 수 있다고 믿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