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다. 언제 저렇게 내공이 쌓였을까? 자취를 3년째 하니 그 시간만큼 실력도 늘었나 보다.
시작은 이미 30 분이 넘었지만 냄비에서는 아직도 보글거린다. 시작할 때 1시간 걸린다고 하더니 1시간은 이미 넘은 것 같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해준다는 생각에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뱃속에서는 이미 천둥과 번개가 치고 이제는 고통스러웠다. 너무 배가 고파서.
옆에 있는 다 큰 아들은 언제 다 하냐고 아무것도 안 하고 맨 입으로만 보채고 있었다.
오빠가 옆에서 보채도 큰 소리 한번 안 하고 묵묵히 요리를 이어간다.
기다리다 할 수 없어 과자 한 입을 먹으니 "에고 또 먹네. 그러니 살쪄 엄마, 밥 먹기 전에는 내가 먹지 말라고 했지?"
불과 몇 년 전에 내가 아이들에게 수없이 했던 말이었다. 기억이 한동안 안 났었는데 딸의 말 한마디에 아이들 어릴 때의 일들이 소환되었다.
딸은 내 나이 26살에 태어났다.
첫 딸이자 마지막인 딸이며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큰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생겼다. 흥부네 가족이라도 만들 요량이었거나, 농구단 하나쯤 만들고 싶었는지 우리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내리 연년생으로 둘을 낳으니 키우는 내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둘은 정말 달랐다. 일단 딸은 키우기가 수월했다. 혼자서도 잘 놀고 젖만 먹으면 잘 자고 덜 예민했었다. 일단 몸이 가벼워 안고 다니기도 좋았으며 활발했지만 내 몸이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힘이 덜 들어갔다. 하지만 아들은 일단 몸이 무겁고 자주 보챘으며 말썽이 심해서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가장 힘든 점은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유난히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둘째가 바로 생겨서 큰 아이가 얼마간 퇴행을 했었고 불안을 많이 느꼈으며 그로 인해 응석이 많았고 울음이 많았던 것 같다.
딸은 사랑을 독차지했다. 사람들 앞에서 애교는 기본이었고 늘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였다. 집안 일도 도와준다고 항상 부엌에 들어와 할머니와 엄마 옆에서 놀았다. 큰 아이와도 잘 놀아서 힘들었지만 연년생이 좋은 점이었던 것 같다. 친구처럼 함께 놀고 함께 자랐다. 우리 가족 중에 마지막 성장기에 있는 사춘기 아들은 거의 혼자 컸는데 그 부분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다.
딸은 작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생수가 별로 없어서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두드러질 수 있었고 뭐든 하면 눈에 잘 띄는 아이였다.하지만 중학교를 올라가니 학생수도 많아졌고 그 안에서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관심도 많이 받았었는데 학생수가 많은 학교에서 눈에 띄이거나 두드러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공부를 잘하거나 부모가 학교에 부지런히 다닌다거나 등 이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아이는 그 누구의 관심은커녕 오히려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힘든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함부로 말을 하여서라도 관심을 받고 싶어 했고 수업시간에도 엉뚱한 말을 해서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마음에는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었는데 아무도 몰랐었다. 엄마인 나조차도.
항상 적극적이였고 사랑 많았던 아이가 변한 것 같아 혼도 많이 내기도 했었다.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되었고 결국 나 자신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와 아이는 절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곧 파국으로 이르게 될 상황이었다.
불려 간 학교 선생님 앞에서 부모로서 아이를 잘못 키운 것 같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기억들이 엄마로서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때는 아이의 자존감뿐 아니라 내 자존감도 이미 무너져버렸었다.
나는 엄마로서 너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나의 감정이 조절이 어려웠고 친정집에 살면서 불안감과 늘 긴장감 속에 살았던 것.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도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어려웠고 엄마의 불안과 긴장을 그대로 안고 학교를 갔던 것이었다. 바로 나 자신이 혼란스러웠기에 항상 엄마를 위해 웃음을 지었던 아이가 한계가 왔었고 사춘기라는 시기에 맞춰 마음속에 억압되고 눌러있던 감정들이 마음껏 올라왔던 것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것이었다. 잘 자라고 있었는데 미성숙했던 엄마인 내가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춘기의 시기에는 그럴 수도 있으며 묵묵히 참아주고 기다려줘야 했는데 기다림이 아니라 자책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내가 딸로서 제대로 하지 못해, 엄마로서 제대로 잘 못하는 것에 대해, 심한 죄책감으로 헤매고 있었던 그냥 나의 모습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었고 아이도 나도 성장하였다. 중학교 이후에도 얼마 간 많이 힘들었었는데 그 힘든 시간들을 잘 견디고 이겨내 준 딸이 한없이 고맙다. 만약 딸이 아니었다면 나는 성장할 수 있었을까?
나를 가르친 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엄마를 사랑한 딸이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는 힘들면 언제든 아이들의 손을 놓을 수 있다. 아이들은 분명 부모를 구원하러 온 천사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알아 볼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맛있는 닭볶음탕이 완성되었고 오늘 우리 가족의 영혼을 채운 최고의 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