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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Dec 03. 2020

이상한 나라의 회사생활

1998년의 직장생활.

20여 년 전.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절을 보낸 내가 현재에서 바라봤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회사 생활을 했었다.

 


첫 직장

식품영양과를 나와 영양사 면허증을 따고

직장을 알아봐 준다는 교수의 호출만 기다리던 어느 날.

공단에 있는 한 회사에 가보라는 얘기에

우리 과에 세명이 줄줄이 면접을 보러 간 곳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고 그렇게 난생 처음 취직을 했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해서 좋았고 내심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기쁨도 딱 그만큼 이였다.


지금에서 생각이 드는 건

그리고 의문이 드는 건

회사의 채용 방식.

통상 서류를 먼저 제출하고 통과 후 면접심사인데

그냥 세명이 한꺼번에 회사 로비에서 과장과 대화가 전부였고

심층면접이라든지. 여러 지원자 중에서의 공채 선발이 아니었다.

교수의 부름으로 서류를 가지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회사에 찾아갔고

세명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것이다.

면접이 처음인 우리는 몇 번의 대화로 결정이 되는 의례 모두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또 웃기는 건.

출근하고 첫날 부장님이 내 이름 대신

'고양'이라고 불렀고, 그 이후로 내 이름은 사라지고 그냥 '고양'이였다. 또한 단체급식 영양사일 외에도 회계 담당 여직원과 똑같은 심부름을 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커피 타는 일.

손님이 오면 의례 하던 일도 멈추고 커피를 타야 했다.

사무실에서 막내로 입사는 나는 동갑내기 옆자리 여직원보다 열심히 커피를 타야 했다.

이층에 있는 전무님 실에 달그락 거리는 커피잔을 부딪치며

오르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다음으로 취직한 친구는 큰 기업으로 갔다는 얘기와 연봉이 얼마라든가. 전문직으로 대우해준다거나

그 무엇보다 가장 부러운 건 커피 심부름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맨 처음 취업으로 내심 우쭐했던 마음이 오히려 짜증이 일어났었다.

겉으로는 축하한다는 말은 했지만 정말 부러웠었다.

당장이라도 회사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회사가 생긴 이후로 영양사로는 세번째이라고 하였다.

이 자리는 딱 2년이면 시집을 가서 모두 그만두는 자리라며

웃는데 나는 전혀 웃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 운명은 이미 예견되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이로부터 나는 딱 2년 회사 생활을 마치고 정말 시집을 갔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그만둬야 했었다.


이상한 회사 생활에서 빼놓으면 안 되는 이야기는 당연 상사. 그 이름은 과장

실수라도 하면 서류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성질대로 안되면 화를 내는 데

정말 잘 못 걸리면 완전 감정의 쓰레기를 나에게 쏟았다.

첫 출근하는 날부터 완전 잘못 걸려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었고

텅비실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었다.

항간에는 집에서 부인한테는 꼼짝 못 하고 있다가 회사에 와서 푼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정말인지 확인은 안 되지만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의문인 건 과장님에게만 결제하면 꼭 실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합리화를 해본다.  


술자리 문화에서도 여직원은 꽃이며

상사들 앞에서 재롱을 떠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성희롱이지만 노래방에 가면 당연히 나와 40년도 더 차이가 나는 전무와 상무와 부르스를 춰야 했고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는 문화에서 나라는 주체는 없었다.


고리타분하고 어쩌면 정말 지루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지금도 비일비재한 일일 수도 있겠다. 이름도 사라졌으며,

얼마나 불평등하게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웃고 안기도록 강요했는지

얼마나 나라는 존재를 무시했고,

일의 능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그냥 남성들을 돌봐주고 잡다한 일을 하는

그 당시 함께 했던 다른 여직원의 처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대등하게 남성과 실력으로 겨기는 참 힘든 때였다.


그리고는 결혼으로 직장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히 그 시대를 살았던

순응적인 나의 최대한 발악이었다.

빨리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리가 2년 만에 결혼해서 그만둔 의례의 상징이기보다는

모종의 혁명을 꿈꾸다 좌절로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운명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직장생활은 힘들다. 끝을 알 수 없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며 상하관계에서의 숨막힘을 경험해야하고 보기 싫은 직장동료들 참고 인내하고 봐줘야 하며

수많은 부조리와 불평등과 싸워야 하는 곳이라는 것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잃지 않도록 나를 계속 주시하고 나를 계속 봐줘야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직장이기도 했지만 나도 많이 부족했었다.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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