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면 딱딱한 나무 맛이 날 것 같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고사리 볶음, 노르스름한 머리의 고소함과 줄기의 아삭한 맛의 정겨운 콩나물 무침, 울긋불긋 붉게 물든 시원한 무생채, 잘 빠진 알싸한 맛의 도라지 무침들과 고추장과 계란 프라이 하나가 검은 돌그릇에 지글거리면 재빨리 젓가락으로 젓는다. 모두 혼연일체가 된 비빔밥은 절묘한 맛을 풍기며 내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호호 불면서 먹으니 금세 바닥이 보였다. 비빔밥 한 그릇에 뭔지 모를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이 생겼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책을 읽을 시간은 많지 않다는 핑계로 나를 합리화했다.
진득하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책 읽다가 설거지 하고, 밥하고, 수다 떨고, 빨래를 한다.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잠시 쉴 때 책을 읽으려 하면 끝마치지 않은 일이 생각나고, 책상 주변이 더럽고, 괜스레 오늘따라 연예인 얘기가 궁금하여 가십 기사를 읽고 있으며, 살 것도 없는 데 쇼핑몰을 들락거린다. 책상 위에는 읽다만 책이 수십 권이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읽다만 책들은 책 겉표지로 중간이 접혀졌거나, 책갈피가 꽂혀 있다.
한 장이라로, 한 챕터라도, 한 문장이라도 하루에 조금씩 읽기로 했다.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
배지영의 <군산>, 김탁환 <아름다운 것은 지키는 것이다>, 선안남의 <명륜동 행복한 상담실>
오늘은 한 장씩 읽었다.
눈이 감겨서라는 핑계로,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이유로, 오늘 일이 너무 많았다는 이유로,
하지만 괜찮다.
이렇게 읽다 보면 언젠가는 다 읽게 될 것이다.
신기한 것은 비빔밥처럼 책을 다 섞어서 읽었지만
섞일 것 같은데 내용이 하나도 섞이지 않는다. 인체의 신비, 그 놀라움은 끝이 없다.
하나의 책을 보면 어제 읽었던 부분과 연결이 되고, 또 다른 책을 읽으면 전에 읽었던 내용의 흐름이 이여진다.
비빔밥에 나물들과 고추장과 계란 프라이는 다 다르지만 하나가 되었지만
책들은 각자의 맛과 풍미와 색깔과 정서와 심리와 단어와 줄과 문단이 다 다르지만 섞여도 하나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