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툭. 현관 앞에 무언가를 떨구는 소리가 났다. 은실은 안 봐도 안다. 만철이 통발에 들어온 문어 한 마리를 놓고 가는 걸까. 집 앞 바닷가에 통발을 내려놓으면 쏠쏠하게 문어며, 벤자리며, 무늬오징어가 들어온다고 자랑인 듯, 보고인 듯 전한 적이 있다. 나이 들어 손을 놓았지만 만철은 예전엔 선원 좀 거느리는 선주였다. 이젠 갯가로 나가 낚싯대를 던져 참돔이며 벵에돔을, 가까운 선원에게 얻은 갈치 등속을 은실의 문 앞에 던지고 간다. 옆집의 명랑 아지매 완순이 발치에 걸린 물건을 들고 들어오다 웃음을 흘렸다. “오늘도 우렁각시가 왔다 감샤? 하영(많이) 무겁다게. 요새 우리 은실 씨 얼굴이 점점 피네, 피어이.” 은실은 눈을 흘기며 대거리했다. “쓰잘 데 없는 소리 말라. 우린 그냥 너나 나신디(나한테) 없는 걸 나눌 뿐이라게.”
2
은실은 뿔소라 철에는 바당에서 숨비질해 잡은 소라를 삶아 만철의 창고에 떨구고 온다. 그 집 식구들로 북적일 때는 근처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건만 이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문 없는 대문을 지나 창고까지는 간다. 성게 철엔 노란 속을 꺼내 바닷물에 씻은 다음 하얀 대접에 담아 전한다. 등뗑이에 햇빛 받고 잡은 보말은 삶아서 핀으로 속을 말아 올려 큰 종지에 담아 건넨다. 우영팟에서 키운 채소도 철따라 갖다 놓는다. 올해는 늙은 호박이 풍년이라 몇 덩이를, 그밖에 상추며 쪽파며 가지며 오이를 창고 선반에 놓고 왔다.
3
어릴 때 둘은 갯가에서 바닷것 잡으며 놀던 사이였다. 사춘기를 지나선 키 크고 열없이 웃기를 잘하는 만철에게, 자그마하지만 요망진(똘똘한) 은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뿐, 좁디좁은 섬이라 그 이상 나가지는 못했다. 평생 짝이 되기엔 두 집안 살림이 한참 기울었다. 중매가 성하던 시절, 부모의 결정에 따랐다. 그렇게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 남편이 일찍 명줄을 놓은 은실은 물질로 아이들을 키워냈다. 병을 달고 사는 안사람을 대신해 아이들을 도맡았던 만철은 십여 년 전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두 집의 아이들은 성장해 큰뭍(제주 본섬)으로 떠나고 이제 만철과 은실만 서로의 적막한 둥지에 가볍게 남았다.
4
은실은 새벽에 일찍 깨 화투로 일진을 뜨고, 괜히 손주들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뒤적이고, 양치질을 해본다. 그랬건만 창밖은 여직 까매 방안을 서성인다. 오늘도 긴 긴 하루를 어찌 버틸라나. 참 징허다. 그만 콱. 그래도, 경허민 안 되커라. 내가 하르방보다 오래 살아야 멸치 한 종지라토 더 볶아주곡, 배추 한 포기라토 더 전해주지 않을라? 그래, 그래야겠구나게. 은실은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는 기분으로 세면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틀어 몸을 적셨다.
5
만철은 저녁을 지으러 나가다 말고 주춤한다. 혼자 먹자고 따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늘어놓는 일 모두 성가시다. 그래도, 경허민 안 되커라. 내가 할망보다 오래 살아야 찬장이 내려앉으면 고쳐주곡, 세상일에 어두운 할망에게 새 소식을 전해주곡, 생선 한 보퉁이라토 더 들이밀어 주지 않을라? 그래, 그래야겠구나게. 끙, 만철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 쌀을 씻으러 부엌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