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풍랑주의보로 ‘블루’가 텅텅 비었다. 집이 비면 무엇을 한다? 그렇다. 친구 불러다 놀아야지. 베프에게 연락했다. 둘이 데크에 앉았다. ‘블루’에 둥지를 튼 이후 처음이다. 방 밖에 서서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은 있었지만. ‘블루’의 지대는 살짝 높아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늘은 푸르고, 포구에 매인 배 두어 척은 한가롭고, 건듯 부는 가을바람은 어찌 그리 청명한지. 저 멀리 중국 여행객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크루즈가 지나간다. 무비자 입국 허용기간이라 그런지 자주 보인다.
2
삼촌은 호박잎과 뿔소라장을 가져왔다. 우영팟에서 기른 호박잎은 보들보들한 놈으로 골라 땄단다. 직접 만든 소라장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입은 부지런히 놀리면서 노는 손으로는 호박잎의 거친 줄기를 벗겨냈다. 베프의 우영팟은 지금 누런 호박과 호박잎 천지다. 시월 내내 호박잎 쌈을 즐겨도 될 정도다.
3
베프가 돌아가고 나서 한 끼는 취향대로 푹 쪄낸 호박잎에 소라장을 얹어 싸 먹고, 한 끼는 소라장비빔밥을 해서 먹었다.
4
소라장비빔밥을 만드는 방법. 소라를 삶아 얄팍하게 썬 뒤 모아둔 전복 내장과 톳을 얹고, 마늘과 칼칼한 홍고추·청고추로 비릿한 맛을 잡고, 코시롱한(고소한) 깨로 마무리하면 끝이다. 한 숟가락 그득 떠서 입안으로 들이밀면 시큼 짭쪼름한 소라장의 깊은 맛에 둘이 먹다 하나가 탈영해도 모를 정도다.
5
예전엔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놀이처럼 끼니를 풍성하게 챙겼단다. 소라장비빔밥을 만든다는 연통이 돌면 마을 아낙들이 몰려가 평상을 점령한 다음, 낭푼에 밥 한 덩이 크게 떨구고, 소라장을 줄줄줄 흘린 다음 슥슥 비벼 입이 미어지도록 퍼 넣었다. 앞집이나 뒷집 남정네들의 흉을 보며, 올레에 큰 웃음소리를 날리며. 요즘 삽짝엔 오가는 발길이 뚝 끊긴 지 오래다. 그땐 참 좋은 시절이었다며 베프는 눈길을 먼 바다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