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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소라 숨비러 갑서예

by 배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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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소라의 계절이 돌아왔다. 소라를 숨비는, 즉 잡아 올리는 철은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다. 원래는 9월부터였지만 여름내 달아오른 바당의 수온이 식지 않아 해마다 채취 날짜가 밀리고 있다. 해녀들은 8월의 보말잡이 이후 두 달이나 쉬어 몸이 많이 불었다고 하소연이다.

2

물때가 다가오면 해녀들은 루틴을 시작한다. 모슬포에 나가 영양제를 한 통 맞고, 손톱을 다듬은 다음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다. 거친 일에 손톱이 찢어지는 것을 예방하려는 것이다. 테왁을 꺼내 마당 못에 걸고, 까만 잠수복을 꺼내 빨랫줄에서 거풍을 시킨다. 테왁에 꽂아둔 방수시계가 제대로 가는지를 확인한다. 지난여름, 뱃물질이 힘에 부쳤던 해녀는 가을부터 갯물질로 돌아서겠노라 선언한 뒤 테왁과 망사리를 작은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노년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3

해녀들은 저녁 어스름에 혼자 혹은 서넛이 모여 바닷가를 걷는다. 그렇지만 물질을 앞두고서는 걷지 않는다. 힘을 비축해 두려는 것이다. 난 요즘 저녁산책이 허전하다. 종종 마주치는 삼촌들과 웃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파이팅을 받곤 했는데 홀로 걸으려니 적막강산이다. 재게재게 걷고 있을라치면 “뛰어, 뛰어, 젊으니까 뛰어!” 하고 목소리로 뒷바람을 실어주던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올 듯하다.

4

물질 첫 날이다. 바당의 배가 폭 꺼지는 썰물 때라 물에 들기 딱 좋다. 파도가 차르르차르르 가볍게 밀려왔다 쪼르르쪼르르 가볍게 쓸려나간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대비해 화장을 곱게 마친 삼촌들은 감기기운이 비치면 판콜을, 갈증에 대비해선 포카리스웨트를 전동차 짐칸에 묻어둔다. 물질하러 나서는 해녀들 앞으로 나서지 말라는 베프의 조언대로 뒤에서 전동차 구르는 소리가 나면 나는 멈추어 선다. 그리고 돌아서서 인사를 한다. 삼촌들은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간다.

“오늘 고치(같이) 소라 땡겨.”

(난 이런 농담이 좋아 헤벌쭉 웃는다.)

“오늘은 바다가 잘도 잔잔허다이.”

(난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공기가 좋져?”

(난 예, 하고 대꾸한다.)

“가지 말앙, 이디서(여기서) 고치 살암져.” (난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인다.)

5

해녀들은 바닷가에 도착해 집에서 입고 온 잠수복을 점검하고, 납벨트를 찬다. 잠수복의 부력 때문에 몸이 바닷물에 동동 뜨니 납으로 누르려는 것이다. 준비가 끝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갯가로 내려간다. 파란 하늘, 주황색 테왁, 검은 바위를 타고 내려가는 해녀들의 일렬종대. 정말 아름답다. 그림 같다. 물가에 당도해서는 바위에 걸터앉아 물안경에 물을 적신 다음 봄엔 쑥으로, 가을엔 호박잎으로 닦는다. 김 서림 방지다. 오리발을 신고 나서는 테왁을 텅, 멀리 던진다. 해녀들은 이제 하나둘 바당으로 뛰어든다. ‘요왕님, 오늘도 나를 무사히 받아 줍서양.’ 마침내 뿔소라의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 바당에 주황색 보석이 점점이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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