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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한들한들

by 배경진

1

베프는 전동차를 타고, 나는 걸어서 산책을 했다. 조금 쌀쌀하지만 걷기엔 딱 좋다. 흰색·보라색·자주색 채송화가 어우러진 올레를 지나, 청보리가 무성했던 밭을 지나, 억새가 한들한들 흩날리는 바닷가를 따라 한 바퀴 돈다. 슈퍼문 시기라 방파제 옆구리까지 바닷물이 그득그득하다.


2

베프는 손가락을 들어 설명한다.

“이딘(여긴) 우리 오빠 밭, 저딘 모슬포 동성식당네 집안 밭. 얼마 전에 수자 딸 잔치 먹으러 갔던 그 식당 말이라. 이딘 동숙이네 밭. 저디 저 밭은 민철이가 집안 대대로 물려받았던 땅인데, 그 아인 놀아김서방이라 이젠 다 팔아 먹고 쫓기듯 본섬으로 도망가 버렸다게. 끌끌, 못난 눔.”

“놀아김서방요?”

“베짱이추룩(베짱이처럼) 노는 거밖에 모른다는 말이주. 갸인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게. 이딘 해녀가 물질을 하다 돌아가서 묻은 산(무덤). 저딘 공동묘지 자리였곡.”

걷다 보니 몸이 살짝 데워져 전동차를 세우고 내 웃옷을 짐칸에 실었다.


3

“저디 파도가 한 데로 안 치고 어지럽게 왔다갔다하지 안햄샤? 하늬바람(북풍)이 부는디다 마파람(남풍)이, 거기에 샛바람(동풍)과 갈바람(서풍)이 한데 섞여 몰아쳐서 파도가 저디 어지러운 거라.”

섬사람들은 동풍이니 서풍이니 그렇게 멋없이 말하지 않는다. 하늬바람, 마파람, 샛바람, 갈바람. 음률도 좋고, 정말 시적이지 않은가.


4

“저디 갯가 바위가 거뭇거뭇하지 안핸? 배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파도 따라 이디까지 들어왔댄. 해경이 사이렌 불곡 난리 났젠. 우리 해녀들이 모다 모여 그 아이들헌티 종이걸레 받아 닦았주게. 우리가 드가서 숨비는 바다가 오염이 되민 아니 되켜, 아암.”


5

바닷가에 외따로 서 있는 오두막 한 채. 앞마당에 호박 덩굴이 구른다. 가파도엔 우영팟뿐만 아니라 온 천지에 호박이 덩굴째 눈에 띈다.

“올핸 비가 적었는디도 호박이 잘 됐주게. 나도 늙은 호박 쉰 개쯤 딴 거 닮아(같아). 호박 잘 되는 집은 부자로 친다는디, 겨난(그럼) 우리 아이들 다 잘되었으니 난 잘도(정말) 부자주.”

햇빛가리개모자 아래 보이는 삼촌 얼굴엔 나름 잘 경영해온 인생사가 내비친다. 큰 것을 바라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삶의 굴곡을 헤쳐 오면서, 자식의 무탈에 안심하고, 작은 일에 마음을 낭비하지 않는 해녀. 난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삼촌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물마루(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를 떨구고 있다. “내일 또 봅서.” 우린 원조짜장 삼거리에서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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