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팥죽_먹으러_와

by 배경진

1.

며칠 전 친해진 삼촌이 헤어질 때 말했다. “동지팥죽 먹으러 와.” 내겐 참 기쁜 한마디였다. 12월 21일, 해녀 삼촌들의 단체방에 들어갔다. 단톡방이 아니라 단체방, 즉 가파리경로당. 동짓날 오전 10시에 모여 팥죽을 해 먹는단다. 마을회관 앞에서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온다. 이상하다? 옆집 삼촌이 지나가다 경로당이라고 가르쳐준다.

2.

경로당 앞마당에 해녀전동차가 일렬로 섰다. 벌써들 왔는가 보다. 현관문을 옆으로 미는 순간 깜짝 놀랐다. 와글와글, 후끈후끈, 덜덜덜덜. 너른 경로당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니 와글와글, 밖은 풍랑주의보가 내려 바람이 세찬데 안은 보일러를 한껏 돌려 후끈후끈, 운동기구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덜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할아버지 한 명이 휴대폰 통화를 끝내며 어떻게 왔느냐? 뭐하는 사람이냐? 묻는다. 간단히 소개를 한 다음, 들어가서 동지팥죽을 같이 먹어도 되겠느냐 허락을 구하니 흔쾌히 그러란다.

3.

순신 삼촌이 멀리서 아는 체를 한다. 옆에 와 앉으라고 손바닥으로 장판을 두드린다. 노인회장한테 인사를 했느냐고 고갯짓을 한다. 아, 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가 회장이었네. 다시 가서 인사를 드리니 용궁식당 주인이기도 하다며 소개를 한다. 뻘쭘할 뻔했는데 순신 삼촌이 옆의 사람에게 인사를 시키고, 곰살궂게 이야기를 이어준다. 정말 고맙다.


4.

경로당엔 노래방기기와 안마기, 런닝기구를 비롯한 간단한 운동기구가 놓였다. 안마기 인기가 제일 좋다. 비어 있을 시간이 없다. 식사를 기다리던 해녀 삼촌 한 명이 일어나 선곡을 마친 후 노래를 시작한다. 아침 10시 반부터! 한밤중도 아니고, 알코올 끼도 없이. 역시 트로트다.

5.

방문 저쪽 주방에선 젊은 여인들이 팥죽을 쑨다. 젊다고 해봐야 50, 60대. 식사시간에 맞추느라 일손이 바쁘다. 사이사이 서로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느라 손도 입도 한가하지 않다. 눈치껏 일어나 상을 펴고, 수저를 놓고, 김치를 나르고, 팥죽을 상 위에 올렸다. 소금이나 설탕을 더 넣는 사람도 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삼촌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다닌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기분은 좋다. 나는 ‘초대’에 들떠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기에 배가 고파 하얀 새알부터 얼른 입에다 넣었다. 아앗, 뜨거워! 소리도 못 지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의 빵을 먹는다더니, 눈물의 팥죽을 먹고 있다. 해녀 삼촌들과 친해지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는데, 무려 40여 명과 눈인사를 나누고, 블루오션에 산다며 보고를 하고, 팥죽을 함께 먹고, 믹스 커피를 마셨다. 섬에 온 지 21일 만에. 기록해두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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