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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가파도. 아니, 아니, 청보리가 아니라 노랑 보리여. 그랴도 사방이 탁 트여 가슴이 씨원해여~!”
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곳, 전망대를 걷던 방문객이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그렇다. 지금 가파도 들판은 보리의 황금물결로 굼실굼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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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람과 잦은 태풍 때문에 다른 작물은 자라지 못해 보리만 심기 시작했고, 태풍이 오기 전인 5, 6월에 수확을 하므로 청보리만 살아남았다. 쌀이 귀해 입쌀밥 넉 되를 먹지 못하고 시집을 갔다는 주민 영자 씨의 표정엔 억울함이 설핏 비친다. 이젠 청보리 덕분에 전국에서 방문객이 몰리고, 잡곡 없는 하얀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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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늦가을부터 보리농사를 준비한다. 트랙터로 땅을 갈아엎으면서 농사개시를 알리는 것이다. 후각을 일깨우는 흙먼지 냄새, 참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이 가파도 청보리 농사와의 첫 대면이었다. 보들보들해진 흙 위로 비료를 먼저 뿌리고 이어 씨를 뿌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싹이 돋아나오고 녹색 키가 한 뼘씩 하루가 다르게 자라다가 4월이 되었다. 청보리가 가장 열심히 성장을 이루는 달. 한 달 내내 짙은 녹색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대니 가파도는 방문객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룰 수밖에.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해 나도 가파도를 향해 가장 활짝 열린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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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되자 차츰 누런 옷으로 갈아입더니 지금은 6월, 청보리가 무거운 고개를 한껏 늘어뜨리고 있다. 비와 바람과 농부의 잦은 발길이 키운 보리가 수확을 기다리는 것이다. 밭둑 가까운 곳에 있는 보릿대를 하나 꺾어본다. 알곡을 둘러싼 날카로운 피뢰침 같은 보호막, 외부의 적으로부터 열매를 지키려는 본능이리라. 알곡을 씹어보니 딱딱해 입안에 머금고 침으로 돌돌 녹이니 하얀 알갱이가 씹히면서 고소한 뒷맛이 남는다. 이제 다 여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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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일반보리와 청보리로 나뉘는데, 알곡이 청색이라 청보리라 일컫는다. 참새들이 밭으로 내려 앉아 먼저 시식을 하지만 그 숫자가 미미해 농부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른 아침 산책을 하다보면 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뒤에서 달려든다. 돌아보면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을 도는 동옥 삼촌이다. 나는 땅 위에서, 그는 오토바이 위에서 눈인사를 나눈다. 그렇게 보아서일까. 얼핏 스친 그의 표정에선 수확을 앞둔 농부의 만족스러움이 담긴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