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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 수확엔 새참이 필요해

by 배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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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는 가을걷이를 일컫는 말이니, 보리는 추수가 아니라 수확이 맞는 표현이겠다. 가파도의 청보리 수확이 끝났다. 지난주엔 현장을 따라 다니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가파도의 6월은 직사광선의 강도가 육지의 한여름에 버금간다. 쨍! 쨍! 칼날같이 예리하다. 농부는 그 땡글땡글한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작업을 한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나도 나무 한 그루 없는 들판에서 숨을 곳이 없었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라 밤엔 오이로, 마스크팩으로 열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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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청보리농사는 김동옥 삼촌과 김영근 씨 둘이 한다. 삼촌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에게, ~씨는 나보다 적은 이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전에는 집집마다 농사를 지었지만 이젠 두 사람만 남았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고독하게 그 너른 밭을 오가는 고된 노동이다. 열흘 말미에 각자 10만 평의 곡식을 거두어야 한다. 축구장 46개 정도의 면적이다. 수확은 길게 시간을 잡을 수 없다. 비가 올 수도 있고, 납품업체와 약속한 기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수확 도중 비라도 내리면 삐끗, 차질이 생긴다. 콤바인이 진흙탕에 들어갈 수가 없고,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노심초사다. 얼른 얼른 하자. 서두르는 게 보인다. 아침에 농기구 보관소에서 만나면 농부들의 표정이 그렇게 읽힌다. 제발, 제발 비만은…. 농부는 하늘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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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이 시작되었다. 가만 보니 그들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섬의 서쪽 밭 먼저, 중앙로가 다음, 동쪽이 맨 나중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웽웽웽웽, 탈탈탈탈 콤바인 소리가 들판 가득 퍼진다. 방문객들은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농부는 차양 긴 모자에 선글라스, 긴 남방으로 내리꽂히는 햇빛을 가린다. 나도 선크림을 고루 펴 바르고, 얼굴을 온통 감싸는 가리개에 선글라스, 양산, 팔토시로 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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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바인 앞쪽의 칼날에 갈려 알곡은 기계 속으로 떨어지고 보릿대는 밭으로 떨어져 쌓인다. 콤바인이 지나간 길은 꼭 바리깡으로 머리카락을 민 것 같다. 콤바인 통이 다 차면 알곡이 800kg짜리 포대로 떨어진다. 이제 보리는 가파도를 떠나 탈곡을 거친 다음, 수매업자에게 넘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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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가 싹을 틔우고, 자라고, 마침내 열매가 맺히자 농부의 마지막 손길이 거쳐 갔던 과정들. 수확을 함께할 새참이나 노동요가 없는 들판이었지만 ‘해넘이 한해살이’를 직접 대해본 신기함과 기쁨은 컸다. 어디서 농부를 만날 것이며, 어디서 수확하는 광경을 마주하겠는가. 이제 다 끝났다. 가파도 사람들은 오래도록 허허로운 벌판을 마주할 것이다. 다시 씨를 뿌리고 청보리 싹이 트기 전까지는….

콤바인 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웠다. 새참은 없었다.
알곡이 실하게 여물었다.
완전무장한 나. 잠깐만 서 있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이제 우린 오래도록 허허로운 벌판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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