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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신애

by 배경진

운진항에서 오후 3시 배를 탔다. 모슬포 나갔다 가파도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 시간엔 방문객이 없다. 볼일을 보고 귀가하는 주민만 있을 뿐. 자리가 텅텅 비었다. 배의 맨 앞쪽은 주민들이 주로 앉는다. 나는 오늘처럼 바람이 활랑활랑 불고, 파도가 거세게 뒤척이는 날은 중간쯤 자리를 잡아 멀미에 대비하지만 짐이 좀 많아 맨 앞에 앉았다. 뒤로 갈수록 내릴 때 짐이 짐스럽기 때문이다.

뒤따라 들어온 해녀 신애 씨가 옆에 앉는다. 동네에서 만나면 눈인사를 주고받았을 뿐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튼실한 몸피,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햇빛에 타긴 했지만 딱 보기 좋을 정도의 피부색. “언니, 모슬포 다녀옴져?” 첫 마디가 ‘언니’다. 흠칫 놀랐다. 이렇게 사근사근 다정하게 언니라고 불러준 해녀는 처음이다. 오오!


“나는 1963년생, 예순세 살이우쿠다. 언니는?” 내 나이를 말하니 그렇게 안 보인다, 동안이라며 추어준다. 그럼 뱃물질을 하느냐 물으니 그걸 다 아느냐고 반문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보통 해녀는 일흔 전까지 배를 타고 나가는 뱃물질을 한다. 나이가 들면 호흡이 달려 깊은 잠수를 하지 못해 갯가로 나다니는 갯물질이 시작된다. 가파도 뱃물질은 50, 60대가 주류, 갯물질은 70, 80대가 주류다. 신애 씨의 망사리는 보지 않아도 전복으로, 소라로, 성게로 찢어질 듯 무거울 거다. 아직은 한참 더 왕성하게 용왕님의 물건을 건져 올릴 수 있는 큰잠수(상군)라는 말이다. 까만 잠수복을 입으면 터질 듯한 허벅지가 빛날 나이다.


그녀는 짧게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부분 비슷비슷한 스토리다. 가파도에서 태어나 가파도를 떠난 적이 없고, 결혼 후엔 가파도 해녀로 살아온 세월. 옛날 부모들은 딸들에겐 공부를 시키지 않아 해녀 말고는 할 게 없었으리라. 간새꾸러기(게으름뱅이)로는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섬. 입에 문 밥 삼키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바다로 달려 나가 번 돈으로 아이 둘 공부시켜 길을 터주었단다. 정말 몸이 찢어지도록 일을 했다며 허공에 대고 웃는다. 이제 좀 여유롭게 사나 했더니 요즘은 바다에서 물건이 안 나와 벌이가 신통찮다며 얼굴에 그늘을 짓는다.


나보고 아이는 몇이냐 묻는다. 비혼이라고 하자 베프의 반응처럼 순간 얼굴에 낭패감이 서리더니 곧 자세를 고치며 잘했어, 혼자 사는 것도 좋지 하며, 독신의 가벼움을 하나둘 꼽는다. 누가 뭐랍니까…^^.

“가파도에 언제까지 있을 거꽈?” 하고 묻기에 “1년” 했더니 조용하고 좋은 곳이니 더 살아보라고 권한다. 한마디로 거절하면 매정해 보일까봐 “살아보고…”라고 말끝을 흐렸다. 배에서 도착 안내방송이 나온다. 십여 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그녀와 나는 만리장성을 쌓은 기분이다.

상군해녀들이 배 위에서 출발 전 준비를 하고 있다.
공영호가 해녀들을 싣고 뱃물질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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