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풀코스 마라톤 후기
2025 서울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30km 이후부터 25번쯤 울고 싶었던 것 같은데, 벌써 기억이 미화돼 버렸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고 10k 49분의 준수한 기록을 가진 상여자 호소인 Y는 언젠가부터 ‘마라토너’라는 타이틀이 제법 탐났다. 함께했던 러닝 크루에 풀코스 완주자가 많아서, '그래, 힘들어도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지' 싶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진 않았달까?
그래도 겸손은 미덕이라, 하프 마라톤부터 도전했다. 할 줄 아는 욕이 생각보다 없는 것에 분노하며 겸손에 진정성을 얹어주었다. 훈련 계획에 따라 한 달에 200km씩 착실히 뛰고 있었는데, 오래 만나던 남자 친구와의 이별 이쓔로 훈련 종목이 주량 늘리기로 바뀌었다.
하도 주변에 풀코스 얘기를 해 둔 탓에, 퀭한 모습에도 ‘훈련하느라 상태가 안 좋겠거니’ 싶었을 테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렇게 꽤 그럴싸한 위장으로 전락했다.
“아니 4시간 넘게 어떻게 뛰어. 러닝머신 11로 안 쉬고 뛰어야 4시간 컷이라며?”
“42.195km? 난 차도 일주일에 그만큼 안 타는데.”
“기안84가 풀코스 뛰고 대상 받았잖아. 그만큼 진짜 엄청 어렵다는 거지.”
“그쵸. 저도 여차하면 그냥 중간에 지하철 타고 집 가려고요”
이거 큰일 났다. 완주를 바라면 양심에 털 난 것 같은데. 열심히 밑밥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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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들은 다 이런 거 찍어”
“그 장판 배경은 영 아니다.”
“뛰는 것처럼 다리 각도를 좀 이렇게 해봐”
“내가 에너지 젤도 먹는 것처럼 해줬어.”
대회 전날, 야무진 레디샷을 찍겠다고 30분 동안 가족회의를 했다.
한동안 봄 날씨였는데, 얄궂게도 대회 날은 갑자기 비 예보에 기온이 뚝 떨어진단다.
아몰랑 하고 잠든 상여자 Y와 그 걱정을 대신 떠안은 아부지.
일어나보니 거실엔 핫팩과 우비, 입고 뛰다 버려도 되는 (아빠의) 바람막이 등 뭔가 잔뜩 나와 있었다.
“에이 3월에 핫팩은 좀 오바 아니야?”
“아니야. 비 오면 추워. 들고 있다 버려”
“아 상여자는 이런 거 안 쓰는데”
“다칠 것 같으면 바로 그만 뛰고.”
아빠는 그 새벽에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주시고는 배번으로 실시간 위치를 추적하는 방법까지 찾아뒀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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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빠는 똑똑해.
비는 추적추적, 몸을 가볍게 떨자 선명한 입김이 나왔다.
F그룹이라 출발선까지 가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고, 아빠가 챙겨준 우비와 핫팩이 그렇게 소중했다.
하프까지는 뛰어봤으니, 그 다음이 문제겠다 싶었는데, 준비 안 된 몸으로 뛰는 우중런에 예상보다 빨리 지쳐버렸다. 최애 밴드 터치드의 음악을 들으며 그나마 전투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17k쯤 에어팟이 방전되었다. 첫 번째 위기였다.
하필 그 구간은 주민들을 위해 응원이 금지된 구역이라 빗물에 발 구르는 소리만 증폭되어 막막함이 덮쳤다. 땅만 보며 뛰다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문득 방금 지나온 구간 빼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국내 최대 규모에 플래티넘 라벨 대회라지만, 어떤 마음으로들 42.195km를 꽉 채워 한 사람 한 사람의 레이스를 리스펙과 응원으로 함께 채워주시는 건지.
그 따뜻함은 온전히 전달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칠 줄 모르는 비에 몸은 얼기 직전이었다.
싱글렛 군단과 롱패딩 군단의 우중 파티라니. 이게 낭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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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k부터는 실시간 인생 최장 거리 갱신 중이었는데, 처음으로 뛰다가 쥐가 났다.
“어라라..” 보도블럭에 주저앉았는데, 창백한 얼굴의 러너 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조용히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화이티잉….. 으아아악!”
하고 눈을 질끈 감고는 휘청이며 사라졌다.
“앟ㅎ, 감사합니다악!!"
덕분에 혼자 낄낄 웃다가 허벅지를 몇 대 팡팡 때리고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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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발목이 아파지던 참에 ‘파스’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어색하게 서 있는 러블리한 꼬마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파스가 꼬마를 덮칠까 봐, 바람 불어오는 쪽을 등지도록 살짝 돌려세우고 몸을 낮추어 발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꼬마도 그 조그만 몸을 꼭꼭 웅크려 발목에 파스를 꼼꼼히도 뿌려줬다.
세시간동안 콧물을 야무지게 푼 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하자, 옆에 계신 어머니가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니 다치지 말고, 힘내요!”
그게 꼬마의 마음이든, 부모님의 마음이든-
가족의 힘을 소중히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중에 내 아이에게도 꼭 이런 경험을 안겨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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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는 어느새 파스 냄새로 가득했고, 손에는 물과 이온음료, 콜라부터 시작해서 꿀, 레몬즙, 샤인머스캣, 딸기, 오예스 등 먹을 게 들려지기 시작했다. 단 걸 싫어해 햄버거 세트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먹는 상여자인데, 당의 갈증을 고3 이후로 10년 만에 느꼈다.
배번에 적힌 이름을 보고 “Y 잘 뛴다!” “Y 화이팅!” 하고 연신 외쳐주는 목소리들이, 벅차다 못해 위로가 되었다. 선의를 이렇게 절실하고 감사하게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마지막 3키로정도는 정말 도로가 몰래 계속 늘어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피니쉬라인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함성 덕에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비틀비틀 걸어가 생수 탑에 4시간 넘게 움직인 몸을 기대자 온몸이 저려왔다. 코로나에 걸려 심한 근육통과 몸살이 오던 느낌의 딱 100배 정도였다.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뒹굴 구르며 “저 괜찮아요. 근육통이에요. 심장 관절 괜찮아요.” 하며 한참을 실실 웃다가 겨우 일어나 3달동안 기대했던 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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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다음 날은 회복을 위해 휴가를 쓰고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유난히 나의 풀코스 계획에 관심이 많으시던 부장님의 카톡이 왔다.
“Y 님, 다치지 않고 완주하셨나요?”
“넵! 응원해 주신 덕분에 완주했습니다. 관절도 튼튼합니다!”
“와 대박”
다음 날 출근하니 이미 부서 전체에 완주 소식과 기록까지 소문이 다 나 있었다. 자연 수냉식 레이스 덕분에 다행히 부상은 없었지만, 근육통과 물집, 감기에 절뚝이며 콜록대는 날 두고 상여자인가 하여자인가, 결국 토론이 벌어졌다.
근데 사실 난 안다. 나 진짜 멋진 낭만 상여자인거.
당분간 이 기억으로 또 힘을 내려나.
대견한 마음과 애틋한 애정이 차올라, 앞으로 찾아올 단단한 행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