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식물

by 예이린

찔레라고 했다. 곡선을 그리는 얇은 대에 아기자기한 잎들이 자리한 분재였다. 한옥 창가에서 종소리와 함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식물이 아니라 전시를 보러 간 것이었는데, 자꾸 찔레가 생각났다. 잔상을 되짚어보다 다시 서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잎을 틔웠다는 이야기에 ‘능숙한 사람이 돌보던 것을 서툰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걸까?’ 망설였지만 용기를 냈다. 화분 크기와 비슷한 종이가방에 담겨 가느다랗게 뻗은 수형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집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었다. 행여 어딘가에 스쳐 상처가 나지는 않을까 나도 모르게 보호하고 있었다. 지하철의 몇몇 사람도 조심해주었다. 그들의 몸짓에서 성품이 보였다. 조그마한 것도 소중히 여기는 세심함 덕분에 별 탈 없이 도착했다. 책상 위에 둔 후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서향의 집이라 오후의 진한 햇살이 닿았다. 겨우내 공기가 순환되는 시설만 가동하며 지내온 터라 오랜만의 빛이었다. 작은 나무를 위한 것이었는데 공간이 환해졌다. 마음에도 옅은 기쁨이 피어올랐다.


고즈넉하면서도 생기 있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 갔는데, 그만큼 잘 살피지는 못했다. 바쁜 일정이 있었던 며칠 사이 몇 개의 잎 끝에 생기가 없었다. 무엇이 부족한지 잘 몰라 허둥거리다 창문 바로 앞에 두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나머지 잎들도 더 바싹 말라 있었다. 시간이 지나 ‘아픈 사람을 운동시킨 것’과 다름없다는 설명을 듣고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해 전 기차역 간이 꽃집에서 ‘키우기 쉽다’는 말을 몇 번이고 확인한 후 처음으로 집에 들였던 화분이 시들었을 때처럼 허무했다.


그래도 그때처럼 멀리 하겠다는 다짐은 않았다. 식물은 내 영역이 아니라고 다급히 선을 긋는 대신 일상에 여유가 있어야 식물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조금 한가해졌을 때 같은 곳에서 '목백일홍'을 데려왔다. 회사 건물 앞 커다란 나무가 비슷한 모습이길래 '배롱나무'라는 이름을 살폈고, 꽃이 진 후 진분홍색 꽃잎이 피어나는 걸 발견했을 때 생명이구나 싶어 신기했다. 과한 애정과 무관심 사이 어딘가 자리하려고 애쓰니 잎들도 사계절 내내 무사했다. 왜 식물을 키우는 일을 사랑에 비유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구태여 차를 세우고 화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학자스민'은 차 뒷자리에서 은은한 향을 풍겼고, 한동안 잠들기 전에는 꼭 한 번 코를 '라벤더' 가까이 두었고, '백자단'에 열릴 가을 열매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책상 위 화분이 빼곡했던 밤에는 나만의 작은 정원이 생긴 듯했고, 돌과 삽을 주문해 신문지를 펼쳐놓고 분갈이를 할 때는 흙의 감촉을 직접 느끼고 냄새를 맡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싶었다.


드라마 <검블유>에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햇빛이 많이 필요한 홍콩야자를 어두운 곳에 방치해둔 가경에게 모건은 이렇게 말한다. “살려서 건강해지면 신경 안 써도 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이번엔 살려보세요 그럼.” 가경이 그 화분을 옮겼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경을 닮았던 마음이 지금은 모건을 닮아가는 것 같아 지금이 좋다. 여전히 서툰 손길이라 때때로 놓치겠지만, 자주 느끼고 가끔은 배우며 식물을 곁에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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