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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Nov 13. 2023

내 감정과의 싸움


16강에서 졌다. 11월 제2회 수원시펜싱협회장배의 다사다난함이 이렇게 한 문장으로 끝난다. 호제의 이번 대회 목표는 3등 아니면, 2등, 1등이었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1-2학년 에페에는 20명이 참가했다. 예선전 뿔이 나왔다. 호제는 같은 클럽 에이스인 2학년 형과 같은 뿔이었다. 예선의 첫 경기에서 에이스 형과 붙었다. 결과는 0:4 패. 몸이 무거워 보였다. 이후 예선전에서 4:2 승, 3:4 패, 4:1 승을 기록했다. 2승 2패 11점으로 예선을 마무리했다.


이때부터였다.


호제가 감정 위에 올라탔다. 심한 파도 위에서 서핑하는  사람 같았다. 예선전을 끝내고, 짐이 있는 2층 대기석으로 갔다가 다시 1층 경기장 출입구로 내려왔다. 호제는 본인이 예선에서 통과했는지 자기가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1층에 머물렀다. 주최 측은 1층 경기장 출입문 옆 벽에 경기 결과와 다음 대진표를 A4 용지에 인쇄해 붙여준다.


결과를 몇 분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는다. STAFF라 적힌 조끼를 입은 분들이 나와서 종이를 붙여야 한다고 호제에게 설명했다. 또 수 분이 흘러,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싶어 2층에 가자고 호제에게 권했다. 결과를 선생님이 찍어 보내주신다고 알려줬다. 2승 했으면 예선 통과할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다. 누구 말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 기다리자!”라고 말하고 기다렸다. 호제는 바닥에 앉았다가 서 있다가, 포디움 1위 자리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선생님들과 장난도 쳤다가, 다른 종목 결과가 나올 때면 조르르 가서 보기도 했다. 몇십 년 전, 시험결과를 종이에 인쇄해 운동장에 붙여놓았다던 자료영상이 떠올렸다. 이런 마음이었을까.


예선전 결과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흘러넘치는 뒷모습




드디어 나왔다! 예선전 결과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더니 호제가 외친다. ”YES!!” 그러다가 16강 대진표를 알게 된 후, 다시 걱정과 불안에 휩싸였다.


두둥! 같은 클럽 1학년 친구와 16강에서 붙는다. 이 친구와는 대회에서 만나면 서로 이기고 지고를 반복했다. 클럽에서 연습경기를 할 때면, 친구가 더 자주 이겼던지라 호제에게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16강에서 이 친구를 이기더라도, 8강에서 같은 클럽 에이스 형과 만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를 듣는 순간 호제의 걱정과 불안이 순식간에 커졌다. 2층 대기석에 이동해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걱정을 한다.


“엄마, 나 무서워. 16강에서 친구 만나는 것도, 에이스형 만날 수 있는 것도.“


“호제야, 그럴 수 있어. 경기에 질 수도, 이길 수도 있어. 하나하나 집중해서 하면 돼.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차근차근해봐.”


“엄마 8강 가서 떨어져도 상장 나와?”

“응, 8강 가면 종이 상장 나와.”


호제는 이길 수 있다는 결의보다 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졌을 경우를 부단히도 상상했다. 그러다가 동년배, 형들과 놀며 잠시 긴장을 잊은 듯했다.


1-2학년 남자 에페 16강 전을 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남자아이 5명과 부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 대회는 코치님 없이 나온 선수들이 꽤 보였다. 호제네도 코치님 1명과 10명의 저학년이 참가했다. 도움을 주러 다른 지점 회원 선생님 한 분이 당일 짠하고 나타나셨다.


16강은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다른 피스트에서 진행한다. 보호자들이 경기장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나는 2층에서 바라봤다. 내려가야겠다 싶어 계단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 오롯이 호제가 헤쳐나가보길 바랐다. 11번 피스트가 위치한 2층 관중석에 섰다. 관중석과 평행되게 피스트를 놓았던지라 점수판 뒷면만 보인다.


호제가 피스트에 올라섰다. 1세트가 시작했다. 호제도 상대도 공격하지 않고 스텝만 밟는다. 결국 심판에게 경고를 받은 듯하다.


이후 상대가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호제도 동시에 팔을 뻗었다. 동시타로 1:1


이번에는 호제가 상대에게 공격을 하러 나아갔다. 호제가 공격하는 순간, 상대도 팔을 뻗었다. 동시타 2:2. 이렇게 1세트가 끝났다.






2세트가 시작했다. 상대가 공격하러 다가왔다. 동시타로 3:3.


상대가 공격하는 순간, 호제도 공격했다. 동시타로 4:4.


상대가 칼 휘어짐을 봐야겠다고 심판에게 손을 들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호제도 본인 칼을 잡고 휘어짐을 가다듬었다.


상대가 자리로 온 뒤, 공격을 시도했다. 호제가 찔렸다. 뚜슈! 4:5.

이에 질세라 호제도 공격하러 스텝을 밟으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공격했다. 상대는 찔리지 않았다.


호제가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상대도 손을 뻗었다. 동시타 5:6.


또다시 호제가 공격을 시도했다. 스텝을 밟고 밟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스텝을 밟을 때마다 와이어(바디코드)와 연결된 전선이 바닥을 친다. 척, 척! 척, 척! 덩달아 내 심박도 빨라진다. 심장근육이 다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호제가 공격을 시도했다. 동시타 6:7.


2세트가 끝났다. 호제가 마스크를 벗어 올렸다. 곧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울음이 차올랐다. 이내 참아내며 피스트 끝에 있는 의자로 향했다.


의자에는 사브르 선수가 앉아있었다. 다른 지점 선수 아버님이 사브르 선수에게 말하고, 의자를 호제에게 마련해 주셨다. 호제에게 1분 쉬었다가 나가면 된다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호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앉아 차오르는 울음과 두려움, 분함, 긴장, 내가 모르는, 호제의 각종 감정과 싸우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눈을 감고 입으로 무언가를 되뇌며, 심호흡을 한다. 흐흡, 휴읍.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2층에서도 보인다.




3세트가 시작했다. 호제는 소리를 지르며 마스크를 썼다. 아아아악!!! 호제가 공격에 들어갔다. 척척! 소리를 내며 빠르게 상대에게 다가갔다. 동시타 7:8

상대는 큰 움직임 없이 본인 자리에서 호제의 빈틈을 살짝 찔렀다. 호제의 뚜슈. 7:9.


상대가 다시 작은 동작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살짝 찔렀다. 호제는 찔렸다. 호제의 뚜슈. 7:10.


경기는 끝났다.




나는 1층 경기장 로비로 빠르게 뛰어내려 갔다. 상대 어머님과 호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상대 어머님이 호제와 함께 이동해 주셨다.


“호제야!”라고 외쳤다. 상대편 어머니가 뒤돌아봤다.


상대편 어머님께 “축하해요!” 인사를 건넸다. 호제가 많이 울었다고 전한다.


입고 있던 긴 코트를 두 팔로 펼쳐 호제를 품 안에 꼭 넣었다.


“호제야, 너무 잘했어. 질 수도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느라 고생했어. 엄마는 그런 호제가 자랑스러워!”


“으허엉 (꿀꺽)” 호제는 울다가 울음을 삼켰다. 자리로 돌아와 옷 갈아입고 가자니, 4학년 형의 4강전을 보고 가겠다고 한다. 형 경기를 보고, 1층 로비에서 말랑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


말랑 할머니를 보자, 호제는 또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귀까지 빨개질 정도로. 할머니는 울고 싶으면 울라고 품을 내어줬다.


말랑 할머니 품에 안겨 귀가 빨게지도록 운 호제




밥을 먹으러 이동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말랑 할머니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수원 화성에서 열차탄 얘기를 신나게 했다. 호제는 “재미없거든~”이라 말했다.


펜싱 얘기가 나오자 입을 악물고 울음을 참으며 “펜싱 단어 금지!”라 외쳤다. 그러면서 2세트 쉬는 시간에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김정환 선수가 구본길 선수한테 “이 꽉 깨물어!” 말한 게 생각나서 이도 꽉 물고, 박상영 선수의 할 수 있다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하며 할 수 있다를 되뇌었다고 얘기했다.


이어 이제 12월 단체전 경기는 나가지 않겠다고. 나 왜 펜싱 이렇게 못해지는 거냐고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5월 첫 대회 16강 진출, 6월 16강 진출, 7월 동메달, 8월 금메달, 9월 동메달, 10월 8강, 11월 16강으로 8월 정점을 찍고 대회결과가 하향했다.





게다가 수원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잠시 통화한 깨삐 삼촌은 호제에게 현실적인 응원을 건넨 터였다.


“호제야, 1등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결과로만 보기 때문에 1등을 해야 해.”

“네, 고맙습니다.


“뭘 고맙긴. 현실을 얘기해 줬는데.”

“1등 할게요.”

“그래. 1등 해.”





말랑 할머니는 조수석에 앉아 호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뒤늦게 알고 보니, 말랑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반대편 먼 발치에서 호제 16강 경기를 봤다. 멀리서도 제 자식은 한 눈에 들어왔단다.


“호제야, 호제 마음이 더 커지는 경험을 한 거야.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이 나한테 제일 많이 도움이 돼. 나를 변하게 하고. 오늘 아주 값진 경험을 했어.”


호제의 속상함은 쉽게 달래 지지 않았다.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본인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고. 막상 식당에서 밥 한 공기 뚝딱에, 갈비 3대는 족히 먹었다.




집에 돌아와 밥벌이로 함께 하지 못한 Y와 얘기했다. Y는 호제에게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위로를 건넸다. 조금 지나 Y는 호제에게 질문했다.


“호제야, 오늘 왜 진 줄 알아? 아빠는 실력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응?”


“호제는 이미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거야. 질 것 같다고, 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지는 거야. 다음에는 이기겠다,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하고 해 봐. 그럼 이길 거야.”


Y가 말한 내용은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에 해당한다. 스스로 기대하는 대로 결과가 나온다는 내용이다. 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 지고,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하면 이긴다는 것.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을 하고 생각대로 결과가 나오면 역시 나의 예언이 맞았다고 판단한다. 피그말리온 효과와도 비슷하다.


호제가 했던 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제는 자기 마음, 감정보다 누구와 붙느냐에 더욱 집중했다. 불안함과 두려움이 나를 삼키려고 할 때, 호제는 주도권을 본인 감정에게 줬다. 이럴 땐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고, 내 것이 아닌 것은 빨리 보내주자! 불안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정도, 딱 거기까지만 살려두고, 내가 쌓아온 시간을 믿어보자! 결국 누구를 만나던 마지막은 나와의 마주함이다.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이
나한테 제일 많이 도움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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