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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Aug 23. 2024

꼴찌. 뭐, 꼴찌라고?!


  

2024년 봄날 어느 날 저녁, 호제가 내일 영어학원에서 SR 테스트를 본다고 말했다.

  

SR 테스트(Star Reading test)는 르네상스러닝 회사가 제공하는 영어 시험으로 학생이 문제를 맞힐수록 어려운 문제를 다음 문제로 노출하고, 틀릴수록 쉬운 수준의 문제를 노출시키는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 결과 중 GE(Grade Equivalent) 지수는 보통 SR지수가 얼마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수치다. SR 지수(GE)가 2.0이면 미국 학생 2학년 수준, 4.3이면 미국 학생 4학년 3개월 차 수준의 리딩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엄마, 나 내일 SR 테스트 본다!”

“응, 최선을 다해서 봐. 파이팅!”이라고 짧게 말했다. 주기적으로 보는 시험이라 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본인이 내일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고 있어 내심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이 찾아왔다. 나는 퇴근을 하고, 저녁식사 하는 호제 옆에 앉아 시답잖은 일상 얘기, 아무 말 대잔치를 했다. 식사를 끝낸 호제는 이날도 빠짐없이 거실의 소음방지 매트에 서서 펜싱 자세와 축구 슈팅 자세 연습을 하고, 레고도 만졌다가, 책도 한 번 펼쳤다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이제 영어숙제 시간이다.

  

“호제야, 숙제하자. 할 거 하고 놀자.” 이 말을 할 때면, 언제 즈음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아도 호제가 알아서 할지, 그날이 언제 올지 꿈꿔본다. 아니면 내가 너무 급한가 자아성찰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미 난 말을 뱉은 터.


“할 거 하고 놀자.”

  

호제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영어 책을 읽는 숙제를 하려고 영어학원에서 빌려온 책을 고르던 호제가 내게 말했다.

  

“엄마, 나 오늘 SR 테스트 봤어.

내가 우리 반에서 꼴찌 했어.


엄마, 그래도 나 내일 영어학원 갈 거야! 계속 다닐 거야.


막 4. 몇 나온 친구도 있어. 훌륭한 친구들이 많아.”


예전에 내가 쓴 글을 찾아보면 나올 거다. 난 내 아이가 시험성적이 낮아도, 시험성적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해보지, 뭐! 다시 시도해 보고, 또 해보는 거지, 뭐!”라며 꿋꿋하게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아이로 자라나길 바랐다. 꼴찌 했지만 영어학원 계속 가겠다는 호제를 보고 고맙게도 잘 크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꼴찌’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마치 메아리치듯이. 반에서 ‘꼴찌라고?! 반 평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표준편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뭐, 꼴찌?! 다행히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지라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아무렇지 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럴 수도 있지!!! 성적 하나에 연연하지 말고, 꾸준히 해보는 거지. 꼴찌에서 올라가는 맛이 얼마나 짜릿한데!!! 오늘 무슨 책부터 읽을까?”

  

호제는 책 한 권을 골랐다. 그리고 이제 읽는가 싶었으나, 호제가 책을 들고 침실로 걸어가면서 울먹였다. “나 책 안 읽을래. 영어학원 안 갈래. 안 가면 안 돼? 으아아아앙”라고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호제야, 오늘 속상했구나. 괜찮아. 성적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는 거야. 꾸준히 해보는 거야. 할 수 있어. 책은 재미있게 읽으면 되는 거지. 오늘 책에 무슨 얘기가 있는지 보자.” 어르고 달래 책을 읽었다.


엄마로서의 나는 시험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노력한 과정을 봐주는 엄마가 되길 꿈꿨다. 호제 앞에서 잠깐 몇 분은 그런 엄마인척 했지만, 어떤 부분을 보완하면 좋을지 여쭙고자 다음 날 바로 영어학원 부담임 선생님께 전화상담을 요청했다. 부담임 선생님은 수업 태도도 예전보다 더 좋아졌고, 다른 영역도 잘 따라오고 있으니 책 읽는 행위를 꾸준히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SR테스트는 알고리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이니 괘념치 말라는 류의 말씀을 전했다.

  





여전히 ‘꼴찌’라는 단어가 주는 타격감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여유를 가진 엄마가 아니고, 성적에 꽤나 민감한 엄마임을 아는 시간이었다. 공부는 당사자가 하는 것이거늘, 엄마가 조바심 난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늘 내 감정은 요동쳤다.


책 읽으며 킥킥 거리며 웃고,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면 나에게 얘기해 주고, 읽다가 상상력을 펼치며 그다음 얘기를 꾸며내는 호제를 보며, ‘그래 이렇게 즐기면 됐지, 호제는 호제 속도로 가는 중이지’라고 나를 다독였다. 나의 욕심보다 호제 속도를 존중해 주자, 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은 시간을 지나는 동안, 호제는 숙제하기 싫어! 를 때로는 안 할래! 를 외치며 숙제를 끝내 해내는 시간을 보냈다.


다음 SR 테스트에서 호제는 상위 랭킹으로 급상승했다. 다음 SR 테스트에서는 하락, 그다음에는 다시 상승했다. 호제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무엇보다 두렵기도 했을 텐데 끈질기게 해낸 호제가 대견스러웠다. 숙제하기 싫다 성질부려도 곁을 지킨 나 역시 격렬하게 칭찬한다.


어려움 앞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남자 아이가 담긴 그림을 그려주세요. DALL E3 구동



나는 예전만큼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아이의 성적에 자유로워진 건 아니다. 언제 즈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요즘 난 참으로도 자주, 여러 방면에서 자유를 갈구한다. 손에 쥐고 있는 게 많고도 많은 사람인가 보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긁어모으지 말고, 놓자.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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