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좌측 안압 22.
검진 결과지에는 덧붙여 한 줄, “녹내장 정밀검사를 받으십시오.”
‘뭐? 녹내장이라고?’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치료할 수 있는 백내장이 아니라, 진행을 늦추는 것만 가능한 녹내장?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는 그 녹내장?
단어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의 안과 정기검진일에 맞춰, 나도 같이 가기로 했다.
검진실에서 여러 기계를 거쳤다. 시력 검사는 물론이고, 각막 두께를 재고 시신경 촬영까지 했다. 그중 단연 힘들었던 건, 불빛이 들어올 때마다 버튼을 누르는 검사였다.
안경을 벗고, 렌즈도 뺀 채로 마이너스 시력에 난시까지 있는 왼쪽 눈으로는 초점 맞추기도 버거웠다. 중앙의 주황 불빛만 응시한 채, 주변에서 불빛이 깜빡이면 버튼을 누르는 식이었다. 덜컹이는 기계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오면 잽싸게 반응해야 했다.
그런데 불빛을 놓치면 마음이 요동쳤다.
‘나 지금 이거 못 본 거야? 나 녹내장인 거야?’
‘왜 하필 오늘처럼 피곤한 날 검사를 왔을까.’
집중은 흐트러지고, 나는 나 자신과 끝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차분히 말했다.
“빛 찾지 마세요. 주황색 불빛만 보세요.”
그러다 문득 이 검사는 단순한 시야 검사가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 집중력 테스트, 나와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눈은 그나마 수월했다.
문제는 좌측. 이미 안압이 높고 난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불빛을 놓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오른쪽보다 못 봤다는 건 굳이 수치를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검사 선생님도 왼쪽 결과를 본 후엔 조용했다. 그 침묵이 더 무거웠다.
결과를 기다리며 몇 분을 앉아 있는데, 멍했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입속으로 다짐을 반복했지만, 속으로는 자꾸만 떨렸다.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불빛 검사, 마치 집중력 테스트 같았어요.”
나의 말에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받는 분도, 검사하는 분도 정말 힘든 검사예요.”
그리고 바로 말을 이어갔다.
“제일 궁금하신 부분 먼저 말씀드릴게요. 녹내장, 아니에요.”
그 한마디에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이후 하나하나 결과를 설명해 주셨다.
“그래도 안압이 좀 높으니 평소 관리를 잘해주셔야 해요. 내년 검진에서도 또 검사를 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 또 하시면 됩니다.”
나는 늘 하던 질문을 또 꺼냈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의사는 등산을 예로 들었다.
“20대는 한 시간마다 쉬고, 30~40대는 30분, 50대는 더 자주 쉬어야 하듯이, 컴퓨터로 일할 땐 30분마다 한 번씩 멀리 보며 눈을 쉬게 해 주세요.”
나는 이어서 물었다.
“루테인을 먹는 건 어때요?”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흰머리도 안 났는데 흰머리 염색하는 격이에요. 45세부터 드세요!”
그 명쾌한 답변에 웃음이 났다.
해마다, 주기적으로 안부를 물어야 하는 몸의 부위가 하나씩 늘어난다.
통증을 말하지 않아도 ‘있을 것’이라는 전제로 살아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문득 떠오른다.
몇 년 전, 매일 통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직장 동료에게 내가 했던 말.
“어떻게 참아요? 치료 안 받으세요? 왜 원인을 안 없애요?”
그때 동료가 조용히 삼켰을 말이 이제야 들리는 듯하다.
‘너도 나이 들어봐.’
이제야 알겠다.
몸은 에너지가 다한 건전지를 갈아 끼우듯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없애면 되는 종기도 아니었다.
삶의 변화와 생명력의 파도 속에서, 그 흐름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건강을 지킨다’는 말의 진짜 의미였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관리가 필요한 증상을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엄마도, 아빠도 이렇게 병원을 다니며, 애 키우며, 일하며 살아온 거였구나. 어딘가를 잘라내거나,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를 안고 살아가며.
갑자기 모두가 측은해졌다. 서로를 조금 더 측은하게 바라보면, 세상살이는 조금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누군가의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우고, 내 부족함은 타인의 도움으로 메우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엔 경제적으로든 건강 면에서든, ‘홀로 설 수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유란 함께할 때, 가능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순간도 있다는 생각의 곁이 생겼다.
내가 추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몸에 귀 기울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다. 생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습관들을 지켜내는 것. 예컨대, 30분 모니터를 봤다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 이런 사소한 습관들을 요약하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피곤하면 쉬기.
그리고 이제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지 않는다. 예전엔 몸에 변화가 생기면 원인을 따져 묻곤 했다.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어떤 나쁜 행동의 결과일까. 하지만 이제는 굳이 원인을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안 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변화는 뚜렷한 원인을 알기 어렵고, 하나의 이유만으로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그 원인을 곱씹느라 오늘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껏 미워도 하고 원망했기에 이제는 시시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매일 한 조각의 회복, 한 줌의 습관을 쌓아갈 수 있다면,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