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6일의 기록
지금보다도 더 어렸을 때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그 여행 동반자와의 상호작용이 내 오롯한 여행지에 대한 감상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음악을 들으며 생겨나는 감정에 시종일관 취해서는 혼자 여행하기를 즐겼다니, (그 나이 때에는 으레 있기 마련인) 나르시시즘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되는 것 같다. (지금이라고 나르시시즘이 극복 되었느냐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누구라도 읽겠다는 믿음으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 때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기도 했고.) 이것 말고도 청춘! 활력! 도전! 같은 특정 연령대에서 유행하는 독트린에 가까운 이런 수식어들에 취해서, 아직 활달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전의 상태에서 용감하게(또는 무지하게) 혼자 여행을 떠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쪼록 이 오춘기쯤 되는 시기를 거쳐서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행위의 쓸쓸함의 뒷맛을 절실히 느끼는 심약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니 좋은 것은 둘이 보면 배가 될 지니, 굳이 함께 하겠다는 사람을 뿌리치고 멀리서까지 혼자 쓸쓸함을 곱씹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고로 지금의 나에게 여행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함께했는지에 관한 것에 가깝다. 이번 여행의 동반인은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이다.
그의 할머니는 나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공중화장실용 컨테이너 두 개를 주워다 이어놓은 것이 전부인 듯한 베른 버스터미널의 외관과 평범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탑승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신변을 걱정하는 그녀를 서둘러 돌려보내고, 오랜만에 한국어로 신나게 이야기 할 상상을 하며 멀어져가는 터미널을 창 밖으로 바라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스위스 베른 버스 터미널 -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06:10 소요, MEiNFERNBUS FLiXBUS, €19.00)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서 만난 그녀와 3주만의 재회 치고는 안는 둥 마는 둥한 어색한 포옹이 인사의 전부다. 서로의 존재가 같은 공간에 있음을 못 이기게 의식하던 사람들을 떠나 함께 오랜 시간 침묵해도 편안한 사람과 하게 하니 들뜨고 기쁜 신남보다는 익숙함이 밀려들었다. 마치 디폴트 상태로 돌아온 느낌에 가까운 익숙함이.
인천에서 출발에 프랑크푸르트로 저녁에 도착하는 동반인의 일정에 맞춰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밤 열두시 오십분에 출발해 베를린에 아침 여덟시에 도착하는 버스를 예매했다. 이 계산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는데 첫째로 긴 시간 비행에 더해 밤버스로 인해 이틀 밤이나 잠을 설칠 동생의 짜증이 내 몫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 둘째로 낯선 도시에서 밤 한시까지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여행 책자를 따라 찾은 독일 전통 레스토랑을 찾았다. 착석과 동시에 종업원 아저씨는 메뉴 여기저기를 가리켜대며 사과! 사과! 족발! 돈까스! 한국어를 연발해댔고, 혼이 빠진 우리는 웃어 넘기다 아저씨가 투박하게 테이블에 내다 놓은 사과주 두 잔을 보고서야 한국인 코스로 자동 주문이 되었다는 것을, 사과! 사과!의 외침이 '사과주 두 잔 드시겠어요?'의 의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의견도 묻지 않고 30초만에 자동으로 주문을 해버린 아저씨의 행동을 떠올리기 시작하자 생각의 끝에 화가 치밀었고, 씩씩거리며 올라와 아저씨에게 따발총처럼 '우리는 주문인지 몰랐고, 그냥 설명해주는 것인줄 알았다. 기왕 나왔고 우리도 입을 댔으니 이번엔 마시겠지만, 다음 번에는 의견을 물어 달라'고 영어로 쏴대자 아저씨는 알아듣지 못한 표정과 붉어지는 얼굴로 '노 드링크? 이츠 오케!' 사과주 두 잔을 냅다 가져가버렸다. 황망하게 아저씨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 여행 중에 어떤 나쁜 기억도 미화될 것이라는 스스로의 말을 곱씹으며 질긴 슈니첼을 잘근 잘근 씹어먹기 시작했다. 학센과 슈니첼, 그리고 기름이 감자를 튀긴건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는 감자튀김의 조합은 언쟁으로 인해 우리 테이블을 슬슬 피하던 아저씨를 부르기에 충분히 느끼했고, 그에게 공손치 못했다면 사과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음료를 주문하고 말았다. 우리는 반이 넘게 남은 진수성찬은 앞에 두고 어렵게 주문한 레모네이드를 끝까지 비우며 이 테이블에서 가장 좋은 선택은 음료었다고 입을 맞췄다.
없는 주머니 사정에 알량한 자존심으로 종업원 아저씨에게 팁을 두둑히 주고 죄인처럼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그새 어둠이 깔린 마인강 주변을 걷다 우연찮게 뢰머광장에 닿았다. 술에 취한 목소리들을 뒤로 하고 정처 없이 떠돌다 유로타워를 얼떨결에 지나고, 결국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서 유일하게 새벽까지 영업하던 맥도날드로 향했다. 맥도날드에서 고향의 맛을 느끼며 우리는 두 시간을 더 대기했다. 기내에서의 12시간을 포함해 48시간째 깨어있던 여행 동반인은 턱을 괴고 조는 지경에 이르렀고, 덩치가 산만한 보안요원은 콜라를 쪽쪽 빨아먹다 성큼 다가와서는 자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는 말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떴다. 인간이 왜 잠을 자야하는 지를 역설하는 초췌함을 그녀의 얼굴에서 목격한 후 배뇨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하는 프랑크푸르트의 역을 가로 질러 우리는 베를린 행 버스에 몸을 싣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 독일 베를린 버스터미널, 7:10 소요, MEiNFERNBUS FLiXBUS, €39.50)
독일에서 버스 승차 경험이 3회인 (죄다 6시간 이상의 장거리였던던) 나의 얄팍한 지식을 혹시라도 필요한 누군가에게(버스 정류장이 어딘지 몰라 한참을 헤매는 것은 초행자에게 보기 드문 일이 아닐터) 나누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물론 내가 이용한 버스 회사는 MEiNFERNBUS FLiXBUS로 다른 회사를 이용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1.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하면 훨씬 저렴하다. 예컨대 베른-프랑크푸르트 구간의 경우 온라인가가 €19였던 것에 비해 오프라인에서 구매하면 €49로 2배가 넘는 가격차가 났다. 다른 예로 프랑크푸르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에어차이나의 연착에 대한 악평이 워낙 높아 미리 버스 티켓을 구매하지 않았던 탓에, 온라인가 €8의 프랑크푸르트 - 칼스루에 구간을 기사에게 직접 구매하면서 €18를 지불하게 되었다. 2. 지정 좌석이 아니다. 타기 전 티켓을 보여주고 티켓에 있는 기사가 QR코드를 확인하면 짐을 싣고 빈 좌석 아무 곳이나 내키는대로 앉으면 된다. 화장실 바로 윗 좌석에 앉아본 결과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암모니아 냄새로 가는 내내 괴로워 했으므로 화장실 주변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사실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탓인지 전체 버스에서 알 수 없는 지린내가 미세하게 나긴 했다.) 3. 콘센트/와이파이 등 핸드폰 사용이 편리하게 시설이 갖추어져있다. 버스에 따라 다르긴 했지만 앞 좌석에 USB 포트가 있어 충전이 가능한 경우, 좌석 아래쪽에 콘센트가 있는 경우, 그마저도 없다면 버스 앞 쪽 운전석 바로 뒷 편 좌석에 8-9구의 콘센트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와이파이 사용은 모든 버스에서 가능하고, 별도의 로그인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내 핸드폰의 문제인지 스위스 국경을 넘어선 순간 와이파이가 잘 작동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독일에서만 유효한 서비스인지도 모르겠다. 4. 버스 정류장의 구분이 모호하다. 한국에서는 터미널에 가보면 승강장 번호/목적지/시간 등 상세하게 안내가 되어있는데 독일은 버스 회사에 따라 승차하는 존이 다르고, 안내가 잘 되어있지 않아 티켓에 나와있는 버스 승강지점을 확인하고, 버스가 도착하면 버스 번호, 그리고 최종목적지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라타야 한다. 5. 핸드폰으로 지연 등 스케줄 변경 사항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다. 온라인으로 예약 시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라고 나와있는데, 나의 경우 punctuality로 유명한 독일에서 설마 버스가 지연되겠냐는 생각으로 무시했다가 4시간이나 지연된 버스의 사정을 알지 못해 허둥지둥한 경험이 있다. 핸드폰 번호는 얌전하게 입력해주자.
프롤로그: https://brunch.co.kr/@yejinchoi/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