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의 미학

회색 지대의 실효성

by 하늘빛

버리는 일은 어렵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과 나는 서로를 궁상이라 지적했다. 각자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달랐는데, 나는 예쁜 상자를 버리지 못했고, 남편은 낡아서 잠옷으로밖에 입지 못할 티셔츠를 버리지 못했다. 아이는 상품을 포장했던 리본이나 스티커, 태그 또는 자기가 만든 알 수 없는 공작품, 터진 콘페티 풍선에서 떨어진 콘페티 조각 등을 교구함에 모아두었다. 다른 집에서는 남편 몰래, 아이 몰래 버린다고 하는데 소심한 나는 그게 마음이 쓰여 건드리지 못했다. 확실한 허락을 받아야 버릴 자신이 생겼다.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버리긴 아까운데 나는 쓰지 않을 그런 물건도 많았다. 특히나 아이가 성장하면서 더는 필요 없는 놀잇감이나 책 등이 집의 큰 공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열심히 ‘당근’도 하고 주변에 나눠주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처분해야 할 것들이 생겼다.


버리는 순간에는 불안과 초조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나는 버리기 전에 뇌를 전방위로 가동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청소하다가 탄탄하고 예쁜 노란색 상자를 발견한다. 먼지가 쌓여 있는 걸 보니 내가 이 예쁜 상자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상자를 내가 버리지 않고 여기에 둔 건 이유가 있을 텐데 아무리 뇌를 굴려 봐도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물티슈로 먼지를 닦아 보자. 깨끗해지니 더 예쁘다. 예전의 이유야 어찌 됐든 이 상자가 마음에 드니 어딘가에 사용해 보자. 집 안 구석구석을 머릿속으로 스캔한다. 이 정도 크기의 상자에 담을 잡동사니가 없을까. 괜히 온갖 수납장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하나 딱히 지금 당장은 쓸데가 없다. 그렇다면 이 상자를 베란다 선반에 일단 두자. 그리고 뇌는 다시 망각 모드에 돌입한다.


이렇게 버리지 못하는 내가 큰 짐을 한꺼번에 버렸던 적이 있다. 이사하면서 기존에 쓰던 옷장을 버리고 새로운 집에 설치된 붙박이장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원래 쓰던 옷장보다 이사 온 집의 옷장 공간이 더 좁은지 옷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이사업체에서는 정리를 포기하고 남은 옷은 수납할 공간이 없다며 비닐 채 두고 가셨다. 며칠 걸려 옷을 고르고 골라 버리기 애매한 옷들을 비닐 안에 넣어 베란다에 쌓아 두었다. 그렇게 한 달이나 있었을까. 집에 손님이 오게 되었는데 집을 정리하다 보니 이 커다란 옷 더미가 갈 곳이 없었다. 다급해진 나는 그날 그 많은 옷을 모두 옷 수거함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때 처분한 옷은 이후에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면 버려야 하는구나.


| 버리는 기쁨

버리는 일이 어렵지 않은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은 바로바로 버렸다. 그 집은 항상 깨끗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단순하고 효율적이었다. 아이가 숲 체험을 하고 커다란 잎을 들고 왔다. '잎사귀가 엄청 크구나!'라며 감탄하던 나에게 아이는 잘 보관해 두라는 지시를 하고는 저 멀리 뛰어가서 친구들하고 놀고 있었다. 내 가방에 있는 커다란 잎을 본 그 사람은 지금 버리면 되겠다고 했다. 나는 혹시라도 아이가 잎사귀를 다시 찾을까 봐 버리지 못했다. 온종일 돌아다니는 내내 커다란 잎이 내 가방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날 밤 잠들 때까지도 잎사귀를 찾지 않았다. 아이가 잠들고 나서야 슬그머니 잎사귀를 버리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버리는 것은 습관이다. 틈만 나면 버려야 한다. 아까 그 사람이 버리라고 했던 그때가 바로 그 틈이었다.


사실 버리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마음 한구석에 나중에 필요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 찜찜하기도 하지만, 베란다에 놓인 옷 짐을 버릴 때도 그랬고, 커다란 잎사귀를 버릴 때도 그랬다. 머릿속의 묵은때를 씻어낸 개운한 느낌이었다. 말끔해진 공간이 넓을수록, 그리고 그 공간과 자주 맞닥뜨릴수록 버리는 기쁨이 커졌다. 그래서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1. 부피나 존재감이 큰 물건부터 버린다. 탁 트인 공간이 클수록 버리는 기쁨이 커진다. 눈엣가시 같던 커다란 짐이 사라지고 귀한 한 평이 생기면 집이 넓어진 것 같아 숨통이 트인다.

2. 눈에 띄는 공간에서부터 버릴 것을 찾아본다. 거실이나 식탁 등 자주 맞닥뜨리는 공간이 깔끔하면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즐거움이 생긴다. 구석에 숨겨진 버릴 물건을 찾는 일도 필요하지만 버리는 기쁨을 위해 습관처럼 자주 사용하는 공간에 있을 때마다 버릴 물건이 있는지 매의 눈으로 탐색한다.

3. 버리기 쉬운 것부터 버린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기에는 머리가 복잡하고 여유가 없을 때,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있다. 세 가지 '품'으로 바로 식품, 의약품, 화장품이다. 유통기한이나 소비기한이 지난 것은 고민하지 않고 버린다.

4. 중고로 판매할 수 있는 것은 판매한다. 중고로 판매하면 소소하지만 적게나마 수입이 생기니 정리할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물건을 넘겨서 그 물건의 수명이 늘었으니 환경에 도움이 되리라는 뿌듯함은 덤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중고 물건을 파는 '당근마켓', 중고 책을 한꺼번에 처분할 수 있는 '알라딘', 중고 옷을 대신 판매해 주는 '차란' 등 여러 플랫폼이 있다.

5. 고민이 되면 쓸만한지 판단하기 위해 일단 써본다. 얼마 전 오랜만에 안 신던 샌들을 꺼내 신었다. 그날따라 검은색 샌들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신었는데 집에 오는 길에 그만 줄이 끊어져 버렸다. 덕분에 미련 없이 샌들을 버릴 수 있었다. 필요할 것 같은 물건도 사실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일단 당장 써 보면 버릴지 말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 회색 지대의 탄생

그럼에도 버리는 건 쉽지 않으니 버리기 전 단계로 베란다 구석에 20리터 쓰레기봉투 하나, 커다란 상자 하나를 두었다. 그곳은 우리 집의 회색 지대이다. 버리기로 마음먹었지만 1% 정도 다시 생각날 것 같은 물건은 20리터 쓰레기봉투에 일단 넣는다. 이곳에 쓰레기를 넣을 때는 다음 원칙을 따른다. 첫째, 상하거나 부패하지 않는 물건을 넣는다. 이 쓰레기봉투가 언제 가득 찰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이곳에서 물건을 다시 꺼내 쓸 수 있게 깨끗한 것만 담는다. 혹시라도 이 물건을 누군가 찾거나, 이 물건이 마침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면 다시 꺼내쓸 수 있도록 말이다. 셋째, 쓰레기봉투를 아이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둔다. 혹시라도 아이가 이 봉투에서 자기 물건을 발견하면 다시 꺼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커다란 상자에는 어떤 물건을 담을까? 이 상자에는 내가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을 담는다. 시간이 있으면 '당근'하고, 기부하거나 '나눔'한다. 이 상자에서 오랜 기간 방치된 물건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없는 물건일 것이기에 20리터 쓰레기봉투로 옮긴다.


이런 식으로 점점 물리적으로 분리해 물건과 거리 두기를 하면 그 물건은 조금 더 버리기가 쉽다. 이 물건을 따로 떼어놓았지만 결국 쓰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인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하게 청소해야 할 때 그 봉투와 상자만 처분하면 되니 청소의 효율이 높아진다. 봉투와 상자가 가득 차 버리고 난 후 베란다를 보면 개운한 마음에 성취감까지 생긴다. 그런 후에는 다시 새로운 봉투를 놓고 다음 '퀘스트'를 시작한다.



금요일 연재
이전 02화정리도 공부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