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동선 그리기

공간의 의미와 기능

by 하늘빛

출장이나 여행으로 수많은 호텔에 묵어 봤다. 널찍하고 훌륭한 5성급 호텔이지만 사용하기가 불편한 곳이 있는가 하면, 비즈니스호텔의 작은 방이지만 공간을 현명하게 활용해 편리하게 구성한 곳도 있다. 용변 중 두루마리 휴지가 걸린 위치에 손이 쉽게 닿지 않아 난감한 적도 있었고, 수건이 샤워부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여 있어 샤워 후 물을 뚝뚝 흘리며 수건을 가지러 간 기억도 있다. 거울 근처에 화장품 놓을 자리가 없어서 화장품을 책상 위에 두고 거리가 먼 책상과 거울을 오가며 화장해야 했던 호텔에서는 아침마다 분주했다. 작은 호텔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렇게 비효율적일 수 있는데 하물며 여러 공간으로 구성된 우리 집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우리 집은 흔히 얘기하는 '국민 평형' 아파트이다. 방이 세 개이고, 거실과 주방, 욕실, 베란다, 현관 등으로 구분된다. 이곳에 부부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로 구성된 세 가족이 살고 있다. 인테리어 업체를 통해 우리 가족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입자라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주어진 환경에서 머리를 짜내 효율적인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려니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먼저 우리 집의 각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떠올려 봤다. 머릿속 생각이 북적거려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아파트라서 인터넷 부동산 정보에 올라온 도면을 쉽게 참고할 수 있었다. 도면에 따라 공간을 구분하고 공간의 기능을 직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붙였다. 부부와 아이가 함께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데 그 방은 '침실', 아이의 옷과 물건을 수납하는 방은 '아이 방', 업무하고 책을 수납하는 방은 '서재'로 정했다. 현관과 욕실, 주방은 그 기능이 명확하기에 간단히 짚고 넘어갔다. 그 외 한 공간에서 여러 다양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있었는데, 거실과 앞 베란다, 뒤 베란다였다.


우리 집 도면 단순화 라벨링.001.jpeg 우리 집 도면과 공간의 이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각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써 보기로 했다.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다단하다. 예를 들어 앞 베란다는 빨래를 말리기도 하고, 아이의 놀이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며,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수납하기도 한다. 기능이 간결하고 직관적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현관에서도 꽤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발을 수납하는 신발장이 가장 큰 존재감을 뽐내고 있어서 단순히 신발을 수납하고 착용하는 곳이라고 여겼으나, 가만히 떠올려 보니 나가기 전에 자동차 키나 양산, 모자 등을 챙기기도 하고, 거울을 보며 용모를 확인하기도 했다. 특유의 생활 방식 때문에 우리 집 서재에서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이를 먼저 재우고 거실 욕실에서 샤워한 후 서재에서 머리를 말리는 습관이 바로 그 예다. 침실과 욕실 사이 붙박이로 짜인 화장대가 있지만 아이가 깰까 봐 침실에서 드라이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매번 어두컴컴한 침실에서 속옷과 드라이기를 슬며시 들고나오는 일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결국 거실 욕실에서 가장 가까운 서재에 화장대를 두고 속옷과 드라이기를 이곳에 수납하기로 했다.


우리 집 - 공간의 기능.png 공간의 기능


이렇게 공간의 기능을 정의하다 보니, 같은 기능이 여러 곳에서 중복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었다. 예를 들면 앞 베란다와 뒤 베란다에 각각 수납공간과 창고가 있는데, 두 곳의 기능이 중첩되고 두 곳 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 수납이라는 기능으로 뭉뚱그려져 어느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만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물놀이용 구명조끼와 튜브, 돗자리 등을 꺼내야 할 때면, 남편은 늘 앞 베란다인지 뒤 베란다인지 헷갈려 했고 결국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놀잇감도 앞 베란다와 아이 방에 분산되어 있으니 아이가 놀잇감을 찾을 때마다 이곳저곳을 쑤시며 힘들게 찾아야 했다. 카테고리의 문제였다. 물건을 수납하기 전에 각 공간에 카테고리를 정하고 해당하는 물건을 수납한다면 찾을 때 수고를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공간의 크기에 비해 물건이 너무 많아 한 곳에 다 수납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 집 신발장은 요즘 신축 아파트의 널찍한 신발장과는 달리 작고 기능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부츠나 장화처럼 목이 긴 신발을 수납할 공간이 없다 보니 눕혀서 수납하면 일반 신발 너댓 켤레 정도를 수납할 공간을 잡아먹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신발 수납할 공간이 부족해서 신발을 말 그대로 '쑤셔 넣고' 있는데, 신발을 넣고 꺼낼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강구한 게 목이 긴 신발은 뒤 베란다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신는 방안이었다. 냉정한 머리는 공간의 기능을 단순화하려면 신발을 처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기울었다. 혹시나 신을 일이 있을까 싶어 남겨 둔 색깔별 하이힐, 구멍이 살짝 났지만 너무 좋아하는 패턴이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남편의 컨버스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내 발에 살짝 작아서 손이 잘 안 가는 구두도 여러 켤레 눈에 띄었다. 슬슬 이 신발들과 작별을 고할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아직 따뜻한 마음이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


이제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가구, 물건의 위치를 짝짓는 일이 남았다. 종이에 아무리 그려봐야 실제로 실행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으니 일단 공간별로 정리를 진행하면서 물건의 자리를 정하기로 했다. 물건의 양과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를 비교하며 물건을 처분하고 자리를 바꿔보는 등의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어느 놈부터 잡아볼지가 고민이다. 가장 작고 쉬운 놈부터 해야 성취감도 들고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맞기를 바라면서 마음속으로 타깃을 하나 정했다.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다음 주까지 그곳을 정리하고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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