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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머리영 Jul 13. 2021

그 해 여름 소나기 2

ㅇㅇㅇ 오빠에게

2주 정도 지났을까? 단체 캠핑의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주말 오전에 전화가 왔다. 엄마가 받으시고 바꿔주셨는데 그였다. 공연팀 선발대로 와서는 빗속에서 여학생들 텐트만 재정비해주고 떠났던 바로 그.


다음 주에 군대에 간다면서 편지 보내겠다는 그런 내용의 통화였고, 정말로 규격봉투에 담긴 편지가 왔다. 곧 답장을 썼다. 위문편지였지만, 불특정 군인 아저씨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기에 첫 줄부터 약간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ㅇㅇㅇ오빠에게


내가 다니던 교회는 집 앞의 작은 교회라서 교회 오빠에 대한 어떤 환상 같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삼촌은 많았지만 오빠라는 대상이 없었고 여중 여고를 다녔으니 오빠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었다.


그저 군인 아저씨에게 보내듯이 군인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다. 훈련이 힘드시겠지만 식사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시라는 매우 통상적인 위문편지. 지금 생각해보니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수준은 벗어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장이 오고 갔다. 휴가를 나오면 차를 한 잔 마시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자대 배치를 받고 그는 군악대가 되었다. 뮤지컬팀에서도 기타를 연주했기 때문에 군악대에 들어간 소식은 자연스러웠다. 군악대에서는 트럼펫을 연주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트럼펫은 물론 기타 연주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규격 편지지에 그의 필체만이 익숙할 뿐이었다.


고3을 보내면서는 편지를 띄엄띄엄 보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장애인 선교단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내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오빠랑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다니던 대학에 진학을 해 그의 후배가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 경력을 쌓다가,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합격통보를 받고 학교 홈페이지를 구경했다. 얼굴보다 익숙한 ㅇㅇㅇ 이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 열심히 하던 싸이월드에서 그를 찾아냈다. 사진은 몇 장 없었지만, 갓난아기 사진이 보였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져서는 글을 남겼다. 그 학교에 강사로 가게 되었다고.


일주일은 기다려야 받을 수 있었던 답장은 재깍 도착했다. 우리 학교에 강사로 오는 거냐고. 너무 반갑다고. 학교에서 보자고.


당시에는 0교시가 있어서 아침에 수업하고, 오후 방과 후 시간까지 학교에서 보낼 수 있었다. 독서 논술부 교실은 도서관과도 가까웠고, 또래인 컴퓨터 선생님까지 셋이서 자주 어울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음악전담교사인 그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방과 후 담당 선생님은 그의 후배라서 결재를 받을 때도 수월했고 항상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셋이서 자주 연구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당연하지' 같은 유행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방과 후 담당 선생님도 나도 결혼을 했다. 0교시가 사라지면서 오후에 나가 정해진 수업만 하고 왔다.  아이를 낳게 되면서는 강사도 그만두었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싸이월드는 잊혔다. 그리고 그도 다시 잊혔다.


이제 다시 서로를 찾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추억하는 것이다. 예쁜 시절을 떠올리며 좋은 사람들과 인연의 고리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의지가 된다. 가끔 생각나는 날이면 오늘도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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