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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Apr 06. 2023

사연 있는 모든 절규

낭만적인 슬픔은 없기를

 영화 스크림 시리즈의 빌런 고스트페이스의 모티브가 된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공포, 두려움을 표현할 때 떠올리는 미술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다. 그림의 중앙에 절규하는 인물의 표정은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운지 말하고 있다.

 뭉크의 대표작은 ‘절규’다. 하지만 필자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그의 작품은 ‘병든 아이’다. 해당 작품은 이전 포스팅의 샤갈의 것과는 다르게 직접 감상한 작품은 아니다. 책을 읽으며 보게 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왜였을까. 다작 작가인 뭉크의 많은 작품 중 무슨 연유로 '병든 아이'라는 작품이 필자에겐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일까? 사실 이번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바로 뭉크의 삶 알아서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 병든 아이



 2년 전 읽은 ‘화가의 출세작’이라는 책에 뭉크가 등장한다. 뭉크의 유년 시절은 가혹했다. 5세 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조현병(정신분열증)의 아버지는 종교에 집착했으며 유일하게 의지했던 한 살 위 누나 소피아 또한 뭉크의 나이 15세에 세상을 떠났다. 순탄치 못한 유년 시절의 영향으로 고독과 불안에 붙잡혀 살았다. 하지만 그 덕에 그의 미술은 성장했고, 미술사적으론 그를 노르웨이의 대표적 표현주의 화가로 평하기에 이르니, 과거의 아픔을 자신의 예술로써 승화시킨 모범 사례임을 증명하는 위대한 화가로 볼 수 있다.




 뭉크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라 뭉크의 어머니와 누이를 죽게 만든 원인에 관한 것이다. 하나의 병이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죽였다. 결핵이다. 지금에서야 치료 불가로까지 보지는 않지만, 과거 인류에게 결핵은 높은 치사율의 무서운 질병이었다. 동시에 아름다운 질병으로도 불렸다. 천연두와 같이 보기 흉한 발진이 난다거나 장티푸스처럼 배설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닌 피부가 창백해지고 기침과 각혈하는 증상만이 있어 외적으로 봤을 땐 병약해 보이는 느낌만 났기 때문이다. 또한 천재들만 걸리는 질병이란 인식이 존재했고 실제로도 당대 유명 작가들이 결핵에 걸려 생을 마감한 적도 몇 있으니 아름다운 질병이란 수식이 붙는 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낭만을 사랑한다. 어떠한 것이든 낭만적이라 불릴 수 있고 모든 인간은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생각한다. 낭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처럼 낭만에 대한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원인을 두고 낭만이라 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질병은 세상에 없다. 아픔을 낭만과 예술로 승화하고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겠지만,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에게 낭만이라는 명목으로 부러움을 표하는 건 어리석고 무지한 짓이 아닐까 다.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결국 인간이다. 인간에게 있어 관계성이 짙은 주변 인간은 중요한 존재이며 사랑으로 다져진 관계라면 그것은 성역의 영역과도 가깝다. 그러니 뭉크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를 나보낸 결핵을 결코 아름답게 바라볼 순 없었을 것이다.


 ‘병든 아이’를 감상하고 필자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절망과 내색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런 부정의 감정이 즐비한 것이 바로 인간의 고통이다. 이를 통해 비록 미래에 나아질 걸 알고 있음에도, 이성적으로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고통에 거하는 이들의 슬픔은 그만큼 힘든 것이니 그 힘듦을 함부로 정의하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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