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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May 09. 2023

우울한 행복

강찬준 - 2

 3학년은 체육활동 없는 체육 시간을 보낸다. 자율 학습 시간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흘리는 땀보다 교실에서 흘리는 땀이 명문 대학과 가까워지는 윤활유와 같은 거라 믿는 어른이 많은 까닭이다.
 학생들에게 미안하긴 했는지 자율 학습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 건 자유로웠다. 하루는 체육 시간에 영어 문법 공부를 하던 중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다. 수업 시간이라 그런지 화장실은 조용했고 닫혀있는 화장실 칸막이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소변을 본 뒤 웬만큼 털이 자라 어른의 것과 비슷한 다리 사이의 좆을 털고 있을 때, 닫혀있던 칸막이 안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허스키 보이스에 나른한 말투, 확실히 남자는 아니었다.


“휴지 좀 가져와 줘.”
“여자야..?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
“알아. 그냥 좀 가져와 주라.”
 민아와의 첫 대화였다.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크게 문제없는 부탁이었기에 쉽게 들어줄 수 있었다. 옆 칸막이의 두루마리 휴지를 휴지 거치대에서 덜그럭거리며 뺀 후 닫힌 칸막이 문 앞에서 말했다.
“위로 던져줄까, 아니면 밑으로 건네줄까?”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여성을 대하는 일이 처음이기에 어떤 행동이 예의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벌컥


 화장실 칸막이 문이 열렸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 곱슬기 있는 고동색 머리의 여학생이었다. 변기에 앉아있던 민아는 부동액 색깔과 비슷한 진녹색 체육복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있었고, 몸을 앞으로 좀 숙이고 있어 허벅지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발목까지 내린 것은 체육복만이 아니었으며 흰색 팬티도 함께 내려져 있었다. 몸에 비해 사이즈가 작은 팬티였는지 변기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있었는데도 발목 사이에 팽팽하게 걸쳐져 있어 화장실 바닥 타일에 닿아있는 헐렁한 체육복 바지와는 대비된 모양새였다.


“그냥 줘.”

 칸막이 문이 열리고 10분 같은 10초가 흘렀다. 한쪽 팔을 뻗었지만 어떤 쪽 팔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몸을 숙인 상태로 한쪽 팔을 뻗어서 그런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던 것만 기억한다.
 이제 와 고개 돌리기도 뭐해서 그냥 시선만 흐렸다. 휴지를 건넬 때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건네준 다음에는 황당했다. 2초 간격으로 당황과 황당을 경험한 뒤 느낀 것은, 대변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비릿한 냄새가 났던 걸로 보아 생리 중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문 닫게 비켜줄래?”
“어어”


달칵


 칸막이 문이 닫힌 뒤, 그 자리에 서서 고민했다. 반으로 돌아가잔 생각과 3cm 두께의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변기에 앉아있는 저 여자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두 생각이 서로 충돌했다. 불과 몇 분 전에 공부하던 영어 문법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전자의 생각은 물 내려가는 소리를 따라 사라지고 진녹색 체육복을 입은 저 아이를 향한 호기심만이 남았다. 나는 손을 씻고 세면대 옆 벽에 기댄 채 문을 열고 나온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키는 10대 후반 한국 여성 평균 정도였다. 150 후반에서 160 초반으로 보였고 헐렁한 진녹색 체육복이 잘 어울렸다. 여자치고 어깨가 좁은 편은 아니었으며 헐렁한 옷임에도 가슴 라인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볼살이 좀 있어 일반적인 여고생에 비해 살짝 통통한 느낌이 났지만, 턱살이 많은 편은 아닌지라 몸매는 글래머스러우면서 얼굴은 귀여운 느낌이 강했다. 이마를 가린 앞머리가 계란형의 얼굴에 잘 어울렸고, 쌍꺼풀 없는 짙은 갈색의 큰 눈은 상대적으로 조금 낮은 콧대에 비해 시선을 모으기 좋았다. 콧대가 높진 않았으나 부드럽게 내려오는 모양이었기에 적당히 두꺼운 입술과 매치되어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니어서 입체적인 얼굴의 느낌이 나진 않았다. 다만 전체적인 조화가 좋았다. 외적인 모습만 놓고 봤을 땐 허스키한 보이스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미형의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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