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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Jul 27. 2023

까뮈 이야기

충격

 제일 사랑하는 작가, 필자의 사고를 분해한 소설가, 실존을 이해시킨 철학자, 그리고 부조리 문학의 대표인.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인류의 시대를 통틀어 말한다 할지라도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 순위 최소 10위권에는 무조건 들어갈 거라 확신하는 까뮈의 '이방인'. 너무나 유명하기에 오히려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던 책이다.


 그러나 인간이 조각난다는, 각성한다는 표현이 어떠한 표현인지 필자에게 일깨워주었다. 문학에 젖어 울컥하고, 웃음 짓고, 골똘히 사색에 잠겼던 때가 적다고 할 수는 없으나, 문자 그대로 책 한 권이 직접적 충격을 안긴 적은 처음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며 충격을 안긴 책이 3권 있다. 울림을 주는 책들도 은근 존재하지만 확실한 충격을 준 작품은 3권이다. 아니, 최근까지 포함하면 4권이다. 앞선 3권의 책에 비해서는 아니지만, 네 번째 책 또한 충격의 범주에 든다. 모두 문학이고 소설이다. 그중 두 번째 책인 '이방인'의 충격은 4권의 책 중 가히 압도적이었다. 알베르 까뮈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진정 보통의 사람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을 정도였으니.. 바람이지만 나중에 이와 비슷한 충격을 또다시 느끼길 원한다. 그만큼 당시 충격의 파장이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읽은 까뮈의 작품이자 과거 언젠가의 11월 7일에 읽었는 우연인지 운명인지 까뮈의 생일은 1913년 11월 7일이다. 이를 알았을 때 괜한 감격이 밀려왔었.


 충격을 안긴 첫 번째 책 같은 경우, 추후 포스팅하겠지만 고등학생 때 읽은 사랑과 관련된 문학이었다. 개인적으론 단연코 가장 사랑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독문학인지 영문학인지, 부족한 나의 식견으로는 정의하기 어려우나 사랑 앞에 그게 무슨 필요겠는가. 그런 사랑스러운 첫 번째 작품의 충격은 은은한 충격이었다. 은은함은 여운이 짙기에, 성숙한 사랑을 동경하는 맘을 품게 되었고 이러한 사랑을 해야지라는 이상을 꿈꾸며 틀을 잡아준 나의 인생 책이다. 물론 충격의 은은함은 여전하다. 다만 그 작품을 읽을수록 향기가 사라지는 것 같아 다시 읽기에 아깝고 그로 인해 더더욱 아끼는 작품이다.

 반면 이방인은 일반적 사고를 붕괴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말하는 일반적 사고의 붕괴란  윤리적, 도덕적 규칙의 배제는 아니다. 만약 그것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뭐 싸이코나 다름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뫼르소가 타인들 눈에 그렇게 보이긴 한다..


 소설의 내용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스포를 거의 혐오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대가 이걸 읽고 집중하게 됨을 바라기 때문이다.




 해석의 이기성, 객관적 논리의 비약과 같은 의미도 다 들어있는 작품이지만 까뮈가 말하고 싶었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는 세상에서의 '실존'이며 책의 가장 중요한 내용 또한 이것이라 생각한다.


 상에서의 실존을 말하기에 앞서 염세를 이야기하자면, 염세는 문자적으로 세상을 싫어하는 것, 이렇게 정의된다. 그리고 '이방인'에서의 뫼르소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생명의 대척점에 있는, 죽음의 불가항력을 마주하고 마주한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서 '실존'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기에 타인의 눈에는 stranger, 이방인의 모습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뫼르소가 무조건적인 염세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를 대입해서 봤을 시, 염세라는 것을 추가함으로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자 해석이다- 몰입이 되었고 자아를 투영해서 볼 수 있었다.


 이전보다 나아진 것 같긴 하나 내겐 염세주의적 사고가 기저에 깔려있다. 이유는 아직도 중2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일수도 있지만, 그냥 선천적으로 좀 그렇다. 반골 기질이 있단 뜻이다. 허나 정작 염세적 사고를 하면서 염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잘못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주위 대부분의 지인들은 필자를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했고 또 부러워했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긍정과 낙관을 지향하기는 하나, 비관의 모습을 가진 나를 부정하고 싶었기에 낙관주의자의 태도를 지니려 노력했고 타인들에겐 그렇게 비쳤지 않았나 싶다.




 신을 믿기에 신이 창조한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것이 죄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죄의식을 감소시켜 주었고 오히려 신에게 감사를 느끼게끔 도움을 준 책이 '이방인'이다.

 어마무시한 충격의 이유를 사고의 붕괴라 하며 거창한 듯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말하자면 뫼르소에게 필자의 모습이 보였고 동시에 공감되어 이해되었을 뿐이다. 겉모습으로 살아왔던 이전의 삶이 말 그대로 껍데기였구나는 생각과 함께, 필자와 뫼르소, 너무도 비슷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을 읽기 전 필자의 삶이 전부 가식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도 인지하기 어려웠던 필자의 모습이 보였고 너무나도 공감되었기에, 이전의 외식했던 많은 부분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고 그 회의감을 통해 결국 나의 진짜 모습은 이러한 것이다 하는 사고들이 정립된 것이다. 내게 '이방인'은 흩어졌던 생각들이 정렬됨을 돕는 신호탄과도 같이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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