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눈 와. 첫눈 와."

by 노란빛방울

방 안 기운이 으침하다. 무엇이라도 오려는지 천장은 내려앉은 거 같고 방 안은 회색감으로 어둑하다. 그 수상한 어둠의 정체를 찾으려 내 방 노란 커튼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어 밖을 조용히 살핀다. 밖을 나가라면 나가겠지만, 사람 접촉을 피하는 병이 도진 나는 커튼 뒤에 숨어 눈동자만 바삐 굴린다.


​아 염병, 눈이 쌓였구나.
주차장엔 누군가 남긴 바퀴 자국만 휑하다. 그 누구도 길을 내며 쓸어주는 이 없다. 내 보라색 스파크는 이 눈이 그치면 녹아 흐르는 눈 구정물에 먼지 떡이 되어 아주 볼만할 것이다. 저 쌓인 눈, 어릴 때나 좋았지 이제는 선택적으로 좋았다 싫었다 하는 이기적인 나이가 되었다.


​마을 살 적엔 안 그랬다. 이웃집에서 빌린 노란 자전거를 타고 달리어도 문제없을 만큼, 마을 빠져나가는 길까지 누군가 그리 쓸어댔다. 빗자루질 방향이 제각각인 걸 보니 한두 명의 솜씨가 아니다. 그 새벽, 일하러 가기 위해 바퀴를 연신 굴리며 나는 그저 이동시켜 주는 자전거에, 그리고 길을 터준 이름 모를 손길들에 감사했다.


​"해피야~ 밖에 눈 온다!", "할마씨, 밖에 봐바 눈 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궁이 불 담당은 내 차지였다. 이미 잠 없는 노인네는 연기로 그을려 새까만 창문 너머로 눈 오는 걸 다 보았다. 코로 냄새 맡는 해피가 그걸 모를까. 그래도 좋아서 외친다. 밖에서는 엄니의 거친 욕설이 들리고, 이내 스윽스윽 거친 빗자루와 흙 묻은 눈덩이가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좋쿠만, 엄니는 참으로 고약해" 하며 할미 옆에 딱 붙어 뽀뽀를 해댄다. 병 옮는다고 밀어내는 할미에게 아양을 떨어댄다. "그 병 다 나 달라고, 할미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성난 엄니 마음 다스려줄 봉다리 커피를 저으며, 또 저으며 그랬었는데... 이제 그 할마씨는 나의 꿈속에서만 숨이 붙어있다.


​이제 스물아홉, 다행히 시집은 간 여자가 이제는 온기 없는 차가운 눈을 바라본다. 출근한 신랑에게 연락이 온다.

"밖에 눈 와. 첫눈 와." 그는 항상 첫눈이라 한다. 원래 기계도 다루고 이런 사람이다 보니, 감성적인 나의 '첫눈'에 대한 정의를 전해주었다. 아니, 주입식 교육을 시켰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늘 새로 맞는 눈은 첫눈이야."


​그는 머리로는 납득이 안 되어도 속으로 '저 마누라 심기를 건들면 안 돼, 십 분만 참으면 세상이 평화롭다' 하며 주문을 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입식 학습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이제는 본인이 저리 속삭인다. '어서 나가 구경하라고 좋지 않냐고' 웃는 그의 얼굴이 눈송이 사이사이 내린다.


​아... 어쩌다 이리 낭만을 잊고 사는가. 불과 몇 년 만에 방구석에 갇혀 내 차 먼지 국물이나 걱정하고 있는지. 그런 나에게 저 버팀목은 아직도 온기를 가르쳐주는구나. 그래서 그는 나의 버팀목이고 나의 배필인가 보다. 온기로 나를 품어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나 보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저 눈 속에 파묻히고,
눈 사이 봄꽃은 뜨거움으로 그 눈을 녹여 나가는 것이 인생의 흐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