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라는 이름은'통제'라는 탈을 쓰고
*6년째 우울증을 돌봐오고 있고 어쩌다 전재산도 날렸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하는 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배려보다 내가 먼저'라는 말은 살면서 배려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대의 사랑'을 기대하고 주었던 대가성 관심에 대한 나의 반성의 말이다.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스스로를 업신여기며 상대를 높여왔다. 항상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고 최고의 리액션을 선사하려 노력했으며 모임이라면 모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곤 했다. 그게 '잘하는 인간관계'인 줄 알았다. 웃긴 건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뿌듯했다는 거다. 오늘도 인간관계를 지켜낸 나의 모습에 안도를 하기도 했다. 인간관계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책을 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100 퍼 오버지 암암) 이 위험하고 힘든 신념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시작해 2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나의 삶이 무너져버렸다.
나는 관계에도 자연스러운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당시 알지 못했다. 그래서 평생을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인데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간헐적으로 한 번씩 만나고 하는 등 시간의 90%를 거진 인간관계에 다 써버린 거다. 그리고 만나면 최선을 다하고 생각보다 카톡 반응이 시원치 않거나 카톡 답변이 늦어지면 "지난번 만남에서 내가 뭘 잘못했나?"를 혼자서 하루종일 곱씹고 또 곱씹고 있었다. 더불어 "내가 널 만나면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면서 서운한 감정들이 쌓여버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당시는 그렇게 당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깊은 나의 마음을 어이없게도 상대는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일부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가 그런 생각인지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이 바빠서 늦게 본 걸 수도 있고, 내가 애써서 잘해줬다기보다는 "쟤는 원래 밝고 맑고 잘 웃는 아이인데 이번 모임에도 여전하구나" 정도로밖에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를 만나면서 보여준 나의 모습이 늘 그러했으니) 심지어 다른 사람은 나에게 큰 관심도 없을뿐더러 각자 인생이 바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인생을 가장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해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나 개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다. 친구들은 꾸준한 한 분야를 파고 파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온 반면, 나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전문적인 능력하나 갖추지 못한 '애매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승진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나를 버려두고 살았는지 그때 알았다. 그러니까, 현타가 너무 늦게 온 거다.
이후 나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했지만 사람을 멀리하게 되었고, 내가 일구어놓은 것들이 (내 생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치 우주에 홀로 떠 있는 듯한 무한한 허무함을 느꼈다. 인간관계에 목숨을 걸어버린 나의 시간들이 아깝고 억울했고 바보 같아서 한동안 자책만 들어 울음이 내내 터졌다.
어쩌면 나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착한 사람콤플렉스로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건 덤!) 불안 속에 살아왔기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불안과 공포가 올라와 '통제'를 하고 싶었던 거다. 배려는 통제라는 탈을 쓰고 있었고, 나는 그 통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무너지게 된 거라 생각한다. 그동안의 삽질시간이 아깝고 또 아깝지만 나를 이 정도로나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앞으로의 시간은 남보다 나에게 더 포커스를 두고 살 수 있게 된 밑바탕이 적지 않게 감사한 요즘이다. 아이러니 모순이 내 마음속에 있으니 그렇게 꼬여갈 수밖에.
그나저나 본래 사람은 모순된 존재이므로 필요 이상의 자책은 주의해야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있고 그렇지 못한 관계가 있다. 만났을 대 묘하게 기분이 나쁘거나 나를 깎아내리는 상대가 있다면 느슨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덜 봐야 한다. 만났을 때 나의 장점들을 칭찬해 주고 서로를 지지해 주는 상대가 있다면 가까이 두어도 좋은 거다. 초등학교 때 알게 된 친구가 있었는데 만나면 다른 사람욕만 하다가 자리가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가 없으면 나를 욕할 아이라는 걸 나는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가벼워졌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용기를 낸 대가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후 그 친구에게 만나고 싶다는 장문의 카톡이 오기도 했다. 마음이 약해져 한 번 정도 다시 만났지만 그 뒤로는 '역시나였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한번 내린 결정은 어지간하면 반복하지 말자 ;;) 관계를 끊었다기보다는 2-3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걸로 사이를 그렇게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늘 변하기에 그때그때 가까운 사람은 자연히 달라질 수 있다. 뚝심 있게 평생친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운과 행복이겠지만, 없어도 크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다. 나에게도 오래된 친구들이 서너 명 정도 있는데 확 가까워질 때가 있고 연락을 거의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하는 거다 (그럼에도 마음이 멀어지지 않는 고마운 관계도 있어서 얼마나 행운인지)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나는 가장 힘없고 권위 없는 존재였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평등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건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열관계를 따지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지지해 주는 친구와 사람관계가 중요해지는 요즘인 것 같다.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런 습관이나 생각을 익혔겠지만, 나처럼 가정폭력에 노출된 환경과 부모의 돌봄을 온전히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혼자 깨닫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 않나 싶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라면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스스로를 잘 꾸려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만인 거다.
인간관계라는 게 언제든지 멀어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건강한 관계를 누군가가 가르쳐주었더라면, 난 지금쯤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중견기업 사무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업무를 고민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될 수 있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본다.
아쉽게도 현실은 그러하질 못했다. 5-6년 경단녀를 뽑아줄 회사는 극히 드물고 일도 쉬어서 손도 다 굳어버렸다. 앞으로 나는 뭘 먹고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