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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Apr 10. 2019

성신 목욕탕

딸아이와 목욕하는 로망

목욕탕 다녀온 후, 시원하게 포즈 잡는 미루


# 딸과 간 목욕탕


미루랑 집 앞에 있는 목욕탕에 갔다. 이름하여 ‘성신 목욕탕’. 맥반석 로얄 사우나도 아니고 불가마 골드 스파도 아닌, 말 그대로 일반 대중목욕탕이다. 커다란 빨간색 벽돌 건물에 수증기를 뿡뿡 뿜어내는 높은 굴뚝이 있고, 그 옆에 누구나 알고 있는 온천 싸인과 함께 굵은 폰트로 ‘목욕탕’이라 자랑스럽게 쓰여 있다. 멋들어진 인포메이션 데스크 대신 시골 극장 매표소 같은 작은 공간에 계신 아주머니께 유리창 구멍 사이로 ‘어른 하나, 아이 하나요!’라고 말하니 앞뒤 다른 말씀 없이 ‘만 원!’ 하신다. 수건 몇 장을 받아 여탕으로 들어가니 여러모로 허름한, 옛날 내가 기억하는 80년대 동네 목욕탕 락카실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천청은 살짝 내려앉았고 벽엔 군데군데 곰팡이가 설었으며 갈라진 틈은 녹색 테이프로 메꿨다. 모서리가 딱 맞지 않는 락카들이 좌우 벽을 따라 일렬종대로 섰고 그 가운데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검은색 가죽 소파 하나가 황제처럼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아무런 장식 없이 숫자만 크게 쓰여있는 얇은 종이 달력과 그 위에서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를 보고 있자니 그냥 절로 피식 웃음이 난다. 체중계, 정수기, 거울, 로션, 빚, 헤어드라이어 등 사우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췄지만 그 조합은 결코 ‘사우나’가 아닌 ‘목욕탕’이다. 

락카 하나에 옷을 다 넣기엔 공간이 너무 작아서 에라, 사람도 없겠다, 두 개의 락카에 옷을 나눠 넣은 후 미루 손을 잡고 욕탕 문을 열었는데, 어라? 생각보다 어르신들이 꽤 계신다. 세신사 아주머니가 열심히 한 아주머니의 등을 밀고 있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온탕, 냉탕엔 수건으로 머리를 올려 매신 아주머니들이 얼굴만 내밀고 계신다. 그 모습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원형 스티로폼 같다. 그 옆엔 한증막도 있다. 역시 천장은 살짝 내려앉았고 군데군데 우레탄으로 메꾼 벽의 흔적이 역력하다. 촤아~ 촤아~ 어깨 위로 물 끼얹는 소리가 뿌연 수증기 사이에서 울려 퍼진다. 



임신 때 빼고 내 인생 최고치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울퉁불퉁한 내 몸을 대중(?)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후덕하신 어르신들 사이에 있자니 그나마 내 몸은 ‘젊은이’의 몸이다. 그 속에서 단연코 빛나는 만 네 살 미루의 싱싱한 몸. 뽀얗고 탱탱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게 탄력 있는 아이의 하얀 살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사실 어차피 뻔한 아줌마 몸, 그 누구도 서로의 몸을 쳐다보지 않지만, 아이의 몸은 유독 튄다. 게다가 지금 미루는 여기서 유일한 아이다. 

씻기보단 물놀이가 더 재미있는 미루에게 욕탕으로 들어오라고 하니 뜨거워서 싫단다. 

‘엄만 뜨거운데 거기 왜 들어가?’

‘엄마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좋아.’

‘시원해?’

‘응. 시원해.’

시원하단 표현도 알고, 제법 늘어난 한국어에 옆에 계신 아주머니도 같이 웃어 주신다. 

‘아이 예뻐라, 몇 살이야?’

‘다섯 살이요!’

‘말도 예쁘게 하네.’

‘고맙습니다아~’

안 들어오겠다는 미루를 때를 밀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겨우 설득해 최소 무릎까지만 몸을 담그게 한다. 생각보다 괜찮은 지 아무 말 없이 발장구를 치며 온탕을 즐긴다. 


옆에 앉아 때를 미시는 아주머니께서 등에 손이 안 닿는다며 바로 옆 아주머니께 등을 맡긴다. 그리고 바로 고맙다며 커피 우유를 건네신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왜요, 초면에 얼마나 시원하게 밀어주셨는데!’

그 옆에서 미루와 나, 둘이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때를 민다. 일주일 만에 밀어서인지 미루 몸에서 때가 꽤 나온다. 계속 나오는 때에 미루를 놀린다. 미루 몸에서 국수가 나와요~. 미루는 재밌다며 키득거린다. 목욕탕에서 서로 등 밀어주는 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로망이라지만 딸내미 손잡고 가는 목욕탕도 그에 못지않은 로망이다. 미루는 바가지로 물을 왔다 갔다 옮기며 한참 물놀이를 한다. 물놀이라면 아이는 노란 오리 인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잘 놀 수 있다. 


제법 오랫동안 목욕을 즐겼더니 몸이 꽤 노곤하다. 시원한 요구르트가 당겨서 서둘러 옷을 입고 나와 편의점으로 가서 미루는 우유를, 난 요구르트를 사 마신다. 나올 때 매표소 아주머니는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미루가 말한다. ‘목욕탕 또 가자!’

어른 육천 원, 아이 사천 원. 전혀 럭셔리할 것 없는 촌스러운 목욕탕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만 원의 행복. 아직 곳곳에 옛날식 목욕탕이 남아 있는 망원동에 살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다녔던 합정동의 목욕탕을 떠올리며 미루와 내 옛날을 공유할 수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다음엔 친정 엄마와 함께 3대 모녀가 미녀 삼총사처럼 목욕탕으로 출동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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