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설 #4-20190710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1.

어쩌다 보니 잡설을 아침에 쓰고 있다. 매우 드문 일이다. 이제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나 싶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냥 아주 오랜만에 맞게 된 빡센 일정의 하루를 앞두고 글이 써졌을 뿐이다.


2.

오늘 아침, 보름 만에 필리필 세부에서 까서방이 돌아왔다. 아침 6시 50분 인천에 도착, 미루가 어린이집으로 등원하려고 출발할 때 똑똑똑 집 문을 두드렸다. 의외의 등장에 미루는 '빠빠!' 소리치며 한동안 안 보여주던 궁극의 환한 미소로 집 안을 밝혔다. 까서방은 거기서 이발을 했고, 긴팔을 입고 있었지만 슬쩍 내비친 손목의 피부가 꽤 까맸고 (까서방의 피부색은 아주 하얗다.) 옷을 못 빨았는지 잔잔하게 냄새가 났다.

즐겁게 다 같이 어린이집으로 출동했고, 내 앞에서 떠들며 가는 까서방과 미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킥보드를 타고 가는 미루의 고개는 옆으로 고정되어 아빠만 쳐다봤고,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어린이집으로 가는 그 짧은 5에서 8분의 시간 동안 둘은 계속 낄낄거렸다. 문득, 미루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 엄마! 나 엄마를 정말 정말 정말 사랑하는데...

- 응.

- ... 사랑하는데...

- 응, 근데??

- ... 아빠가 더 재밌어.

- 아.... ㅜㅜ....


미루는 지극히 순간을 사는 아이라서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그 대상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건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루가 5살이었을 때 나 혼자 영국으로 여행 갔던 2주 동안 날 찾지 않았다. 뿌듯하면서도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2주 만에 본 엄마에게 처음으로 했던 말은 당시 내가 두른 스카프를 보고 '엄마 목에 한 게 뭐야?'였다.)

그런데 웬일로! 이번에 처음으로 스스로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까서방이 간 지 4-5일이 지난 후였다. 그러고선 한 말이 저 말이다.

- 아빠가 더 재밌어.

아아~~ 재미는 사랑을 능가하는가! 그동안 내가 미루에게 했던 온갖 뻘짓과 모든 생쑈는 아빠의 재미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순간 '재밌는 아빠'로서 자리 잡은 까서방에게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인생무상'이라는 깊은 진실을 깨달았다. 재밌으면 다구나.

이제 당분간 아빠에게 광대짓 좀 많이 하라고 떠넘겨야겠다. 나도 좀 쉬자고.


3.

오늘 하루 일정이 '빡셀' 예정이다. 아침 11시부터 드로잉 수업이 있고 (2주 차에 새로 합류하신 분이 있어서 그분을 위해 한 시간 정도 일찍 가서 특강을 할 예정이다.) 1시에 끝나자마자 마포구청 뒤에 있는 노인요양센터로 달려가 어르신 생일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요양센터에 사시는 노인분들을 위한 자리인데, 내가 있는 일반인 해금 동아리가 '찔레꽃'과 '첨밀밀', 두 곡을 연주해야 한다. 연습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그냥 노인분들을 위한 재롱잔치려니 생각하고 편하게 임하련다. 그 후 바로 4시까지 신촌으로 달려가 방탄 안무 전문 댄스학원에서 첫 수업을 듣는다. 웨이브 자체가 안 되는 뻣뻣한 통 아줌마 몸인데, 과연 90분 수업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 다음엔 집으로 돌아와 미루 저녁 차려줘야 하고, 돌아온 까서방 우쭈쭈 해줘야 하고... 이러다 보면 어찌어찌 오늘 하루가 끝나겠지.


10년 전, 한참 일했을 때는 한 달에 공연 세 개를 하곤 했었다. 그땐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정 몇 개를 뛰어가며 정신없이 달렸었는데, 오늘 정말 오랜만에 종일 약속이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뛴다. 가슴이 뛴다는 게, 기쁨에 겨워 가슴이 벌렁벌렁한다는 말이 아니라, 괜히 초조하고 떨린단 얘기다. 나름 스스로 바쁘게 움직인다 생각했는데, 괜히 마음만 바빴지 실질적으로 바빴던 건 아니었나 보다. 마음만 바쁜 건 싫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드니까. 그렇지만 워낙 느리게 오래 살았는지라 다시 바쁘게 살진 못할 것 같다.


4.

위에까지 아침에 썼는데 어쩌다 보니 올리는 건 저녁이다. 역시 오늘 하루 빡셌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잡설'은 밤에 써야 제맛이라는 걸 느낀다. 어설펐던 해금 연주와 더 어설펐던 방탄 댄스 첫 수업의 소감은 내일이나 모레 잡설에 쓰련다.

아아~ 저녁 하기 싫다! 까서방에게 돌아온 기념으로 그가 잘하는 팬케이크나 만들라고 할까?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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