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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설 #6-20190714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1.

게으른 일요일. 까서방에게 미루를 던져놓고(?) 오랜만에 카페로 나와 글을 쓰려는데,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커플이 찰칵찰칵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엄청난 셀카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선 바로 이어지는 닭살 짓. 칫, 누군 닭살 짓 할 줄 몰라서 이러고 있나. 딱 봐도 갓 시작한 커플이다.


지인~~짜 오랜만에 카페로 나와 글 쓰는 건데, 저 찰칵찰칵 소리에 짜증이 난다. 결국 가방에서 헤드셋을 꺼냈다. 카페 배경음악과 헤드셋에서 나오는 음악이 섞여 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새삼, '갓 시작한 커플이란 무엇인가.' 고찰을 하게 되는데, 현재 내가 내린 정의는 '지들은 좋겠으나 주변에겐 민폐'인 존재다. (앗! 방금 다른 자리로 옮겼다! 나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한 그들은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존재다.)



2.

지난 금요일, 무대 디자인 선배와 함께 예술의 전당에서 국립 오페라단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이란 오페라를 봤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조합인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과 쿠르트 바일(작곡)의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라 잘 안 보는 오페라임에도 솔깃해서 달려갔다.


내 기억에 분명히 난 언젠가 어딘가에서 이 공연을 봤다. 우리나라 초연이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아닌데, 당최 언제 어디서 누구랑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봤고, 길게 내려진 현수막이 무대였던 기억이 있지만 너무나 흐릿한 이미지여서 마치 뿌연 안갯속에서 길을 찾는 것 같다.


그런데 공연을 보면 볼수록, 과연 내가 진짜 이 공연을 봤었는지 의심이 갔다. 왜 이렇게 모든 게 새롭지? 극 내용을 모르는 게 아님에도 새롭게 느껴지는 음악과 스토리 전개에, '아,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 낸 걸까? 대학원 논문이 브레히트의 '사천 사는 착한 여인'이었는데, 혹시 그때 논문을 위해 뒤졌던 리서치를 진짜 본 걸로 착각한 걸까?


인간의 기억이란 참으로 묘하고 대단해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인다. 진짜 봤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상황. 진실은 뭘까? 난 날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내리는 판단에 항상 의심을 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오랜만에 브레히트 작품을 보고 있자니, 내 졸업 논문 발표가 생각났다. 어설펐던 영어로 발표하느라 꽤 애를 먹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교수 8명이 반으로 나뉘어 내 디자인을 가지고 찬성, 반대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완전 쫄아서 그들의 설왕설래를 지켜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만 하면 통과되는 논문이었기에 큰 걱정은 안 했다.)


그때만 해도 예일 대학 졸업생과 NYU 졸업생이 같이 여는 무대디자인 전시회 클램베이크(Clambake)란 게 있었는데, 그때 미국 무대디자인의 전설이자 예일대 디자인과 학장인 밍 초 리(Ming Cho Lee)가 내 졸업 논문 디자인을 보고서 신랄하게 비평을 했다. 완전 미국인임에도 중국인 피가 있어서인지 중국이 배경인 이 작품을 유심히 본 것 같은데, 왜 내 디자인에 중국적인 요소가 없는지 따졌다. 중국이 배경인 건 브레히트의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도구일 뿐 꼭 배경이 중국일 필요는 없다고 대들었(?)었는데,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칫, 교수들은 뭐든 꼬투리 잡으려고 안달하는 법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결코 모범생은 아니었다. 번뜩이는 디자인이나 단단한 드라마투르기를 내세우지 못했다. 그저 죽어라 버틸 뿐. 안 되는 영어로 셰익스피어 대본과 희랍 비극을 일주일이나 붙잡아 가며 어떻게든 읽어내 숙제를 간신히 마치는 학생이었다. 교수들이 그나마 날 어여삐 녀겼다면 낑낑대며 버티는 내 모습이 짠해서였을 것이다. 거의 매일 학교에서 숙제하느라 밤을 세웠거든.

학교에서 잘했다고 졸업해서 다 잘 되는 건 아니다. 교수나 브로드웨이 디자이너로 자리 잡은 내 동기들을 보면 학창 시절 그렇게 뛰어난 친구들은 아니었다. 어디서든 버티는 자가 이긴다.



4,

닭살 커플은 가고, 카페 안은 아주 조용하다. 손님은 나뿐이다. 슬슬 시장한데, 방금 까서방이 저녁으로 빵과 수프를 차려놨다고 카톡을 보냈다. 수프 가지고 저녁이 될까 싶지만, 참 고맙구나. 그래도 페북 지인이 올린 비빔국수를 보자 매콤한 게 땡긴다. 편의점에서 비빔면이나 사야겠다. 수프랑 빵을 맛있게 먹은 후 비빔면으로 입가심을 해야지. 주섬주섬 챙기고 카페를 나서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하고니도시의번영과몰락

#브레히트와바일

#개인적으로sevendealysins를아주좋아하는데

#그건언제쯤볼수있을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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