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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설 #7-20190717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국기에 대한 맹세>


1.

요즘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구나. 몰랐어. 하기야 공적인 행사에 갈 일이 없었으니 알 길이 없지. 어제 성산1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주민 자치회에서 식전 행사로 해금 연주를 한 후 재빨리 주섬주섬 챙겨 행사장을 나가려는데, 갑자기 사회자가 '국기에 대하여어어~~ 경례!'를 외쳤다. 그리고 차르르르르~ 드럼 소리와 함께 나오는 '국기에 대한 맹세'. 어렸을 때부터 5시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들었던, 너무 많이 들어서 가슴으로 외우는 그 '국기에 대한 맹세'가 흘러나왔다. 자동으로 차렷! 자세가 되었고 오른손은 내 가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아아~ 이렇게 소름 끼치는 군사 정권 교육의 힘이라니!

그래도 맹세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 대신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으로 바뀌었고 '몸과 마음을 바쳐'는 생략되었다. 이런 작은 자치회에서도 아직 국민의례를 그대로 따른다는 게 새삼스러웠고, 문득 옛날엔 극장에서 영화 상영하기 전에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다는 게 기억났다. 대한극장, 단성사, 명보극장 등이 단관이었을 때, 스크린을 가득 채운 태극기를 보며 일어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맹세를 외웠었지. 이런 거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야, 생각하며 왜인지 모르지만 난 그게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더랬다.


그렇게 맹세를 외우자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례를 한 지가 언제였지? 태극기를 제대로 본 적이 언제였지? 이런 공적인 자리 말고도 다른 행사에서, 이를테면 시상식이라던가 간담회 같은 곳에서도 국민의례를 하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나니 갑자기 국민교육현장의 첫 문장도 생각났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아니, 도대체 왜 이걸 아직도 외우고 있는 거냐고! 그리고 왜 이리 말들이 비장해? 갑자기 분연히 떨쳐고 일어나 만세라도 외치며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아직도 초등학교에서 이걸 교육시키는지는 모르겠다. 세월이 흘렀고 세상도 변했고 이젠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를 때 말고는 태극기를 볼 일이 없다. 아,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은 매일 보시겠지. 아무튼, 새삼스러웠다.

어, 마침 오늘이 제헌절이네. 다들 태극기 다셨나요? 당신에게 태극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2.

일전부터 동장님은 해금 동아리에서 행사 시작 전 몇 곡을 연주해줄 수 있겠느냐 부탁했고, 우린 오케이를 했다. (우린 멤버 5명의 조촐한 동아리이다.) 지난번 노인요양센터의 생일잔치처럼 부담 없는 자리일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알고 보니 주민 대표 50여 명 및 시의원, 구의원도 오는 꽤나 진지한 자리였다! 어이쿠야, 이를 어쩐다. 청중 앞에서 연주하기엔 아직 한참 모자란 실력에, 연습도 충분히 못한 상태이거늘!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쩔쏘냐. 이것도 재미난 인생의 경험이라 생각하며 반주 MR을 살짝 크게 틀어서 거기에 묻어가자고!


사회자께서 '큰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란 안내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멤버 한 분이 우리를 소개할 때 '아마추어' 동아리라는 걸 강조했고, 귀엽게 봐주십사 박수도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얼래? 에잇! 이 친절하신 성산1동 주민분들 같으니라고! 두 번째 곡 '첨밀밀'을 연주하는데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주시네! 순간 전국 노래자랑이 생각나 웃음이 터져 끝날 때까지 실실 웃으며 연주했다.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즐겁게 연주했는데, 동영상을 봤다면 다시 현타가 와서 멍했을 거다.


3.

연주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영화가 펼쳐졌다. 끼익~끼익~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내며 '이랬던' 해금 동아리가 연습에 연습을 거쳐 구 대회에 나가고, 시 대회에 나가고, 중간에 한 번쯤 해체 위기가 있지만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지막 전국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는, '우생순', '슬램 덩크', '쿨 러닝', '메이저 리그' 등에 나오는 모든 클리쉐를 답습하는 영화.

앗, 연주하며 딴생각하면 안 되는데! 박자 놓칠 뻔했네!


4.

정치인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행사 시작하기 전 시의원이라는 분은 앉아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며 '이 테이블은 뉘신가... 시의원 000입니다.' 하고 바로 악수를 청했다. 매일같이 어디서든 모두에게 악수를 청해야 하는 인생.

연습을 못했다고 하자 '연습은 무슨! 아이 뭐, 원래 이런 건 평소 실력으로 하는 거지!'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매일같이 어디서든 모두에게 능글능글 너스레를 떨어야 하는 인생.

뭐든 마찬가지겠지만, 정치인으로 살기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새삼 느낀 ‘유권자’의 힘.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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