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1.
지난 주말, 미루는 동네 놀이터에서 종일 놀았다. 새로운 친구들이 일정한 주기로 등퇴장을 반복했고 미루는 그때마다 먼저 다가가 같이 놀았다. 그러다 휴지기가 찾아왔는지 놀이터가 썰렁해졌다.
- 엄마! 놀 친구가 없어!
입꼬리가 내려가는 순간, 앗, 뉴 페이스 등장!
- 엄마! 친구다! 가서 같이 놀자고 할게에~
미루는 아이에게 다가가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기 아빠를 찾았다.
- 아빠아~ 어떤 아이가 와서 같이 놀재!
누구냐고 묻는 아빠의 말에 아이는 다시 미루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빠에게 답했다.
- 몰라, 그냥 영어 사람인데?
앗, 그 단어다. 주변에서 말로만 들었던 바로 그 단어.
영. 어. 사. 람.
드디어 나도 이 단어를 듣는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분명 미루가 울상을 하고 내게 올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 미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 야! 나 영어 사람 아니고 그냥 한국 사람이거든!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이거든! 그리고 나 영어는 그냥 할 수 있는 거야! (이런 비스무리한 말)
아자아아~ 역시 내 딸 최미루! 어렸을 때부터 자존감 하나만큼은 끝내줬는데, 역시! 나중에 따로 설명해줄 필요가 없겠구나 안심하며, 아이 아빠와 살짝 눈인사를 한 후 난 다시 읽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와 미루는 영어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네덜란드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종횡무진 놀이터를 해집고 다녔다. 미루는 그 아이가 저녁 먹으러 가야 한다며 아빠 손에 끌려갈 때까지 그 아이와 땀을 뻘뻘 흘리며 놀았다.
잘 준비를 하면서 미루에게 물었다.
- 미루야, 아까 놀이터에서 '영어 사람'이란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 응? 영어 사람? 언제? 나 몰라.
잉? 뭐냐 너... 너 정말 순간만 사는 거냐?
미루는 어쩔 땐 어떤 한 감정이 꽤 오래 가다가도 (이기고 싶었을 때 지면 무지 칭얼거린다.) 어쩔 땐 이렇게 싹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모르지. 어느 순간 뜬금없이 '엄마. 옛날에~ 놀이터에서~ 그 여자 아이가 나한테~...'하며 얘기를 꺼낼지. 모르는 듯하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걸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그녀의 자존감은 인정! 개인정!
자는 미루를 쓰다듬으며 오늘도 아이에게서 배울 수 있음을 축복했다.
2.
지인들은 항상 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가 보다. 이제 좀 자리를 잡겠거니 하면 또 떠난다고 하니까.
떡볶이를 먹으며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
난 답을 뻔히 알면서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 아놔, 몰라아~~ 묻지 마아~~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 안 지치냐?
사실 이 질문은 꽤 자주 듣는 질문이다. 자주 듣는 질문이면 면역이 생겨서 자동으로 나오는 답이 있을 법한데 이 질문은 그렇지 않다. 들을 때마다 움찔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치나? 안 지치나? 그렇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쿨해 보이려면 당연히 안 지친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그건 또 아니거든. 무지 지치면서도 또 무지 안 지치거든.
- 아이, 뭐... 그런 거지...
- 그렇긴 뭐가 그래... 네 나이를 생각해.
다시 한번 움찔한다. 네 나이를 생각하란 말은 많은 걸 함축하고 있으니까.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네 나이를 생각해.'
칫... 내 나이가 어때서... 뭐든 하기 딱 좋은 나인데.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라는 말과 같았다. 길게 말해 무엇하리.
- 너나 잘해, 인마!
결국 난 답하기가 애매한 질문들을 피하기 위해 핀잔으로 대화를 끝냈다.
앞으로 이런 대화들은 점점 더 늘어갈 것이다.
나도 미루처럼 자존감의 날을 더 갈아야겠다.
강철 맨탈이여, 나와랏!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