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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설 #8 - 20190718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1.
지난 주말, 미루는 동네 놀이터에서 종일 놀았다. 새로운 친구들이 일정한 주기로 등퇴장을 반복했고 미루는 그때마다 먼저 다가가 같이 놀았다. 그러다 휴지기가 찾아왔는지 놀이터가 썰렁해졌다.
- 엄마! 놀 친구가 없어!
입꼬리가 내려가는 순간, 앗, 뉴 페이스 등장!
- 엄마! 친구다! 가서 같이 놀자고 할게에~


미루는 아이에게 다가가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기 아빠를 찾았다.
- 아빠아~ 어떤 아이가 와서 같이 놀재!
누구냐고 묻는 아빠의 말에 아이는 다시 미루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빠에게 답했다.
- 몰라, 그냥 영어 사람인데?


앗, 그 단어다. 주변에서 말로만 들었던 바로 그 단어.
영. 어. 사. 람.
드디어 나도 이 단어를 듣는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분명 미루가 울상을 하고 내게 올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 미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 야! 나 영어 사람 아니고 그냥 한국 사람이거든!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이거든! 그리고 나 영어는 그냥 할 수 있는 거야! (이런 비스무리한 말)


아자아아~ 역시 내 딸 최미루! 어렸을 때부터 자존감 하나만큼은 끝내줬는데, 역시! 나중에 따로 설명해줄 필요가 없겠구나 안심하며, 아이 아빠와 살짝 눈인사를 한 후 난 다시 읽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와 미루는 영어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네덜란드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종횡무진 놀이터를 해집고 다녔다. 미루는 그 아이가 저녁 먹으러 가야 한다며 아빠 손에 끌려갈 때까지 그 아이와 땀을 뻘뻘 흘리며 놀았다.


잘 준비를 하면서 미루에게 물었다.
- 미루야, 아까 놀이터에서 '영어 사람'이란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 응? 영어 사람? 언제? 나 몰라.
잉? 뭐냐 너... 너 정말 순간만 사는 거냐?
미루는 어쩔 땐 어떤 한 감정이 꽤 오래 가다가도 (이기고 싶었을 때 지면 무지 칭얼거린다.) 어쩔 땐 이렇게 싹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모르지. 어느 순간 뜬금없이 '엄마. 옛날에~ 놀이터에서~ 그 여자 아이가 나한테~...'하며 얘기를 꺼낼지. 모르는 듯하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걸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그녀의 자존감은 인정! 개인정!
자는 미루를 쓰다듬으며 오늘도 아이에게서 배울 수 있음을 축복했다.


2.
지인들은 항상 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가 보다. 이제 좀 자리를 잡겠거니 하면 또 떠난다고 하니까.
떡볶이를 먹으며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
난 답을 뻔히 알면서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 아놔, 몰라아~~ 묻지 마아~~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 안 지치냐?
사실 이 질문은 꽤 자주 듣는 질문이다. 자주 듣는 질문이면 면역이 생겨서 자동으로 나오는 답이 있을 법한데 이 질문은 그렇지 않다. 들을 때마다 움찔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치나? 안 지치나? 그렇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쿨해 보이려면 당연히 안 지친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그건 또 아니거든. 무지 지치면서도 또 무지 안 지치거든.
- 아이, 뭐... 그런 거지...
- 그렇긴 뭐가 그래... 네 나이를 생각해.
다시 한번 움찔한다. 네 나이를 생각하란 말은 많은 걸 함축하고 있으니까.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네 나이를 생각해.'
칫... 내 나이가 어때서... 뭐든 하기 딱 좋은 나인데.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라는 말과 같았다. 길게 말해 무엇하리.
- 너나 잘해, 인마!
결국 난 답하기가 애매한 질문들을 피하기 위해 핀잔으로 대화를 끝냈다.


앞으로 이런 대화들은 점점 더 늘어갈 것이다.
나도 미루처럼 자존감의 날을 더 갈아야겠다.
강철 맨탈이여, 나와랏!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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