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 동네>
1.
친구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전에 유럽에서 땅 보러 다닐 때...’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순간 이야~ 이 말 무지 럭셔리하게 들린다!라고 생각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든, 디테일은 알 게 뭐야, 우야든동 유럽에서 땅을 보러 다녔다잖아!! 괜히 우스워서 낄낄거렸다. 진짜로 샀었어봐, 난리 났겠네! 재 유럽에서 땅 샀대에~~요!
2
한 동네에서 2년 이상 살다 보니 자연스레 동네 사람들과 관계가 형성된다. 미루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과 관계가 생기고, 놀이터에서 자주 만나는 엄마와 관계가 생기고, 자주 가는 카페나 식당, 꽃집의 사장님과 관계가 생기고, 동네 SNS 커뮤니티를 통해 아는 사람이 생기고,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할지언정 길에서 자주 보는 얼굴들이 생긴다. 집 앞 카페에서 일하는 청년을 미루가 좋아하고, 동네 식당 사장님은 알고 보니 내 인스타 팔로워였고, 자주 가는 카페 언니에게 내 드로잉 수업 홍보 전단지 좀 붙여줄 수 있냐고 부탁하고, 친절한 꽃집 언니에게 오픈한 지 1년 된 걸 축하한다며 캔커피를 건넨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했던 우리에게 이렇게 잔잔하고도 시나브로 만들어지는 관계들은 일상의 깊고 묵직한 힘과 따뜻한 소속감을 전달한다. 그래, 이런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찾으려고 하는 거겠지. 우리도 그랬던 거고.
3.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관계란 건 어떤 계기에 의해서 한 단계 높여지지 않는 이상 일차원적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이들은 우리가 떠난다 해도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냥 '요즘 미루랑 미루 엄마 안 보이네... 이사 갔나?'로 끝나겠지. 고로 이런 안정감은 내가 만들어낸 나만의 환상이다. 관계의 연장은 노력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 법. 그래도 길을 걷다 주고받는 동네 사람들과의 인사는 내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줘서 좋다. 왜 영화에도 많이 나오지 않나. 뉴욕에 사는 성격 좋은 주인공이 아침 출근길에 길거리의 모든 상점 주인들과 인사하고,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하며 점원과 어제 한 데이트 결과에 대해 얘기하고, 길 건너기 전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할머니를 받아주는 뭐 그런 장면. 카트리나 앤 더 웨이브스(Katrina and The Waves)의 워킹 온 선샤인(Walking on Sunshine) 같은 노래가 배경으로 흐르면 딱이지. 내가 사는 '동네'가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4.
새삼 김현철이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 게, 세상에, 그가 20대 때 '동네'를 만들었다!
.
가끔씩 난 아무 일도 아닌데 음~
괜스레 짜증이 날 땐 생각해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짧지 않은 스무 해를 넘도록
나의 모든 잘못을 다 감싸준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내가 걷는 거리 거리 거리마다
오 나를 믿어왔고 내가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나에겐 잊혀질 수 없는
한 소녀를 내가 처음 만난 곳
둘이 아무 말도 없이 지치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돌아다니던 그곳
짧지 않은 스무 해를 넘도록
소중했던 기억들이 감춰진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
캬아~ 정말 멋진 가사 아닌가! 달리 천재 소리 들은 게 아니라니까! 어렸을 때 김현철하고 결혼하고 싶었더랬다. 내 이상형이었다. 지금의 아저씨 같은 모습도 좋다.
5.
이 모든 얘기는 오늘 울 엄니께서 새로 이사하신 집에 너무 만족을 표하시며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난 후부터 기분이 너무 좋아. 피곤해도 그렇게 힘들지가 않아.'라고, 전에 하셨던 말씀을 재차 반복하셨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여기저기 다니며 내린 결론이 '결국 내가 뭘 하느냐에 따라 달렸을 뿐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였는데, 엄니께서 날 헷갈리게 만드신다.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