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설 #14 - 20190804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짬밥>


1.

며칠 전, 어쩌다 이른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한 예술 창작' 프로젝트에 심사위원으로 갈 일이 생겼다. 뭐 내가 대단하다거나 유명한 예술가라서 위탁된 건 아니고 순전히 '어쩌다'다. '어쩌다'면 어떤가. 해달라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심사위원 비까지 준다는데.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심사를 맡아주실 분은 옐로우 덕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계신 작가 최승연 님입니다.'라는 소개를 받고 일어나 인사하고 박수까지 받는, 마치 옛날 '창작동요제' 같은 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소개하는 장면을 연출하게 됐으니! 박수를 받는 순간 '이건 뭔가...'라는, 약간의 현실 자각 시간이 왔다.

여기서 들리는 마음의 소리.

- 이보시오! 당신, 여기서 박수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의뢰가 왔더라도 정중히 '무슨 생각으로 저에게 연락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심사위원 같은 걸 할 위치가 안 됩니다' 하고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니오! 당최 양심이란 게 있는 거요, 없는 거요!!'

그러거나 말거나. 닥치시오! 난 마음의 소리에게 소리쳤다.



2.

아, 참고로 이번에 간 건 2차다. 이미 한 달 전쯤 1차 발표회에 심사위원으로 갔었는데, 난 2차 발표회 의뢰에도 거절을 안 한 것이다.

다시 한번 마음의 소리.

- 당신 진짜 뻔뻔하구려. 1차 때 느낀 게 있었다면 2차는 더더욱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니오! 당신에게 양심이란 서비스로 달려온 군만두요, 뭐요?

그러거나 말거나, 시끄럿! 난 마음의 소리에게 소리쳤다. 이번엔 반말로.



3.

젊은이들은 다양한 과학기술을 내세우며 8분이란 짧은 시간에 자신의 프로젝트를 뽑아달라고 열변을 토했다. (뽑히면 지원금이 많이 나온다) 하드웨어를 개발한 친구들도 있었고, Bio-hacking이니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니 '뭔 소리여?' 하게 만드는, 뭐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말로 압도하려는 친구도 있었다. 총 9팀이 발표를 했는데, 쭉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그냥 귀엽다는 거다. 그래, 젊다는 게 저런 거지, 저렇게 무모한 것도 해보려고 애쓰고, 되든 말든 무조건 부딪치는 거지, 그저 이모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고, 그러면서도 가차 없이 아니다 싶으면 '아이디어가 너무 진부하군' 하며 창의력 점수에 야박하게 10점을 줬다. 이모 미소는 이모 미소고, 일은 일이다.



4.

그런데 말이다. 참 웃긴다. 이게 바로 짬밥, 혹은 경험치라는 건가. 그동안 나 스스로 따로 공부해오지 않았건만, 수련을 쌓은 것도 아니건만, 그냥 보인다. 이 친구가 생각을 깊게 했는지 아닌지, 노력을 했는지 아닌지, 기본적인 인문적 소양이 있는지 없는지, 겉멋만 있는 건 아닌지, 딱 봐도 적나라하게 다 보인다. 사전 정보 없이 바로 들어도, 아무리 거창한 말로 포장을 해도 기본 알맹이가 없을 때 덜컹덜컹 요란하게 울리는 빈 수레의 소리가 너무나 잘 들린다. 이건 오래 살면 그냥 얻어지는 건가? 나이와 시야는 비례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거 너무 거저아닌가?)

9번의 발표와 질문 과정을 거치면서 난 마음의 소리에 반문했다.

- 보시오. 양심이고 뭐고, 난 다 보이오! 이 정도면 난 충분히 심사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니오!

순간 느끼는, 이른바 짬밥의 힘. 그래도 헛산 건 아니구나.



5.

그런데 그 순간, 명바기가 항상 하던 말이 생각났다.

-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해봐서 아는 사람의 말로를 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겸손해야지.

이보시오, 마음의 소리. 짜증 내서 미안하오. 당신의 충언, 잘 참고하겠소.



6.

다시 한번, '인문학이 바탕이 안 된 과학은 참 얄팍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젊을수록 '왜'란 질문을 더 할 필요가 있다. 철학이 전공인 까서방을 보며 '사는데 철학이 무슨 소용인가?' 하다가도 이런 상황에 있으면 철학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바탕이다. 모든 과학 기술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나부터 철학 공부 좀 해야겠다. 흠, '어린이 철학 교실'이란 책이 있구먼.


대부분 대학생 팀이었고, 고등학생 팀이 한 팀 있었는데 고등학생 팀이 제일 프리젠테이션을 잘했고 생각도 제일 깊었다. 요즘 친구들은 이렇구나, 무서우면서도 기특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집에 올 때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고 메시지를 받았다. 난 '가난한 바퀴벌레 아티스트(?) 집안에 많은 도움이 됐슴다!'라고 답했다. 가난한 바퀴벌레 아티스트도 심사할 자격이 있다.

아, 총 9팀 중 4팀이 선정되었다. 3차 발표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도 의뢰가 오면 난 오케이를 할 것이다. 알겠소? 마음의 소리? 난 오케이를 할 것이란 말이오!


#나는야가난한아티스트

#후원자누구없소

#대머리심보

#전시회꼭해야지

#최민석작가님스타일을따라해봤음

#모방은창조의어머니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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