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뭣이 중헌디?>
1.
잡설이 잘 써지지 않았다. 덥기도 너무 덥거니와 (게다가 감당할 수 없는 이 습도! 진짜 미치겠다!) 정리할 수 없는 생각이 가슴과 머릿속에 콱 박혀있는데, 이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다른 잡생각을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장 살아야 할 일상이 있기에 잠시 잊을 수 있었지만, 이 생각은 마치 U2의 With or Without You 노래에서 잔잔히 깔린 아담 클레이튼의 베이스 기타 선율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너무 중요하게 내 생활을 지배했다. 뭣이 중헌디? 말을 하면서.
2.
요즘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바로,
죽음이다.
그렇다. 요즘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워낙 무거운지라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죽음은 바퀴벌레처럼 우리 일상 곳곳에 있고 또 바퀴벌레처럼 불멸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나이가 나이여서 그런지 조문 갈 일이 잦아지고, 그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죽음을 접하고 (종류 한 번 다양하기도 하지! 사연 한 번 다양하기도 하지!), 또 이런저런 병과 싸우는 친구가 늘어가기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 어르신이 아프시다면 그냥 그렇구나 넘길 수 있지만 요즘은 내 나이, 혹은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병마와 싸우거나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자꾸 보게 되니, 삶과 죽음이라는, 이 근본적이고도 근본적인 두 단어에 대해 생각과 질문을 아니 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질문하고 사유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극히 전체주의적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7080세대이기에 갑자기 이런 티라노사우르스급 명제를 생각하려니 머리가 빠게진다. 꼴랑 책 몇 권 읽었다고 될 일이 아닌 생각의 깊이. 지난번 심사위원 할 때에 이어 다시 느낀다. 우리에겐 철학이 필요하다고. 흔히 잘 쓴 글 밑에는 '막연했던 생각을 이리 잘 정리해주시다니요!' 같은 댓글을 보기 마련인데, 이런 댓글을 쓰지 않으려면 평소 생활화된 철학이 있어야 한다.
...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아... 또 정리 안 된다.... 글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하나? 어떻게든 이번 잡설을 끝내고 싶은데 말이지...
3.
아무튼,
그래서,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니까 꼭 무슨 자살 계획이라도 세우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고, ‘~에 대해'란 표현은 영어 about을 번역한 번역투지만, 이 경우엔 번역투라도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써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죽음과 관련된 전반적인 걸 생각하니까.
생각은 한도 끝도 없다. '그냥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영원히 안 깨는 거잖아'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좋지만, 생각이란 놈은 '그러면 섭하지!'하며 심술을 부린다. (난 공주가 아닌 게야. 키스로 깨워줄 왕자도 없는 게야)
사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린 죽음이란 현상 자체보다는 죽음의 반대 격인 삶을 더 생각하고 질문한다. 최소한 내 경우는 그렇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라던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지난날의 나와 타인을 향한 회한, 아쉬움, 분노, 혹은 미련, 자신이 쌓아온 인간관계와 커리어,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그들이 내리는 평가, 믿어왔고 지탱해줬던 모든 가치에 품는 의문, 행복했던 날이든 슬펐던 날이든 그 모든 날의 의미, 앞으로 태어날 생명과 그들이 살아갈 세상 등등... 죽음은 나 혼자 눈 감는다고 끝나는 게 아닌, 무궁무진한 질문의 던짐인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건 '뭣이 중헌디?'란 질문으로 응축된다.
4.
맞다. 뭣이 중할까?
오늘 암과 투병 중인 친구와 함께했다. 친구는 항암 12회차 후 CT 촬영을 받았고, 다음 주에 결과를 보고 항암 치료를 계속할지 정한다고 했다. 나 외에 다른 친구 3명이 달려와 이 친구의 병원행을 함께 했다. 그중 한 명은 매주 병원행을 같이 한다. 속으로 생각했다.
- 짜아~식,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데 말이지! 잘 살았구먼!
촬영 후 샤부샤부가 땡긴다는 친구의 소원대로 샤부샤부를 먹었고, 후에 커피숍에서 옛날을 회상하며 까르르댔다.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수다가 재밌는지 괜찮다고 했다. 대화가 길어졌지만, 그래서 힘들 텐데, 집에서 쉬는 게 나을 텐데, 했지만, 수다 속에 병마를 잠시 잊고 내가 알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웃는 친구를 보며 지금 이 순간을 최대치로 누려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때 나에게 중했던 건 참고 참았던 아이스커피를 몇 모금 마시며 궁극의 환희를 보여줬던 친구의 표정과, 미치도록 무더운 한나절에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즐기는 소소한 수다의 소중함이었다. 그러자 미루가 생각났다.
5.
요즘 말괄량이 삐삐에 푹 빠져 있는 미루는 자신과 삐삐를 동일시한다. (까서방이 유튜브에서 네덜란드어 버전을 찾아 보여줬다.)
이 더위에 삐삐처럼 긴 양말과 부츠를 신겠다고 하고 (그렇다! 이 더위에 말이다!), 삐삐처럼 똑바로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누워서 자고, 원숭이 인형을 닐슨 아저씨라 부르며 항상 목에 달고 다닌다. 지 이름도 미루가 아니라 삐삐라며 미루라 부르면 쳐다도 안 보고 'My name is Pippi!'라고 외친다. 아침마다 철사를 넣어 삐삐 머리 만들어주는 것도 곤욕이고, 이제 주근깨까지 그려달라고 할 기세인데 그건 또 언제 그리나.
미루는 말할 거다. 뭣이 중헌디? 롸잇 나우! 지금 이 순간 삐삐보다 중헌 기 더 있는감? 난 삐삐처럼 긴 스타킹 신고 원숭이를 어깨에 달고 살 거시여!
뭐 하나에 꽂혀서 그것만 생각하며 사는, 이토록 지독히 순간만을 사는 아이의 능력이 진심 부럽다. 폭염 따위는 그녀를 멈출 수 없다.
6.
으아악~~! 당최 이 잡설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계속 곱씹고 곱씹으면 끝없이 가지를 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 가겠지. 이 감정을 제대로 정리 못 하겠다. 그리고 사실... 평생 정리 못 할 것 같다. 죽음의 그 찰나, 그때 모든 게 정리되려나? 그때 난, 잘 살았노라, 즐거운 소풍이었노라, 용감히 빠이빠이를 고할 수 있을까?
이 참에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한 번 읊어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오늘은 여기까지.
뭣이 중헌디?! 실로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작가가 누구냐?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