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설 #23 - 20191008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변명>


1.

잡생각은 수시로 내 머릿속을 드나드는데 그걸 받아 적을 손은 두 개밖에 없고 펜과 핸드폰은 항상 사정권 밖에 있다. 생각난 문장을 외워보려고 몇 번 반복해서 읊조리지만 미루의 엄마~! 외침 한 마디에 훅 허공으로 날아가버린다. 하기사, 중요한 일도 자꾸 깜빡하는데 잡생각을 기억할 리가 있나. 그래도 자기 전에 앉아서 잡설 써야지 하지만 자꾸 다른 일들이 치고 들어온다. 아놔, 단순하게 살고 싶다니까! 게다가 까서방은 자기랑 안 놀아주면 삐진다. (요즘 우린 자기 전 미드 Grace and Frankie를 두 편씩 본다.) 젠장... 독립적인 인간이 되란 말이야, 이 양반아! 그리하여 쓰지 않을 혹은 못 쓰는 이유는 또 하나 늘어간다. 변명이다.



2.

세상에 공표하노니 (셀러브리티도 아닌데 무슨 공표냐 하겠지만, 내 잡설을 읽어 온 당신은 이미 알아챘지 않았는가? '이 여자 관종이구먼!'하고. 나는야 어설픈 관종!) 2019년 12월 9일, 우리는 한국에서의 약 3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비행기를 탄다. 첫 도착지는 필리핀 세부(Cebu)고 12월 26일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K.L)로 간다. (필리핀 입국이 편도 티켓으로는 안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무비자 기간인 한 달 안에서 비행기표가 제일 싼 날짜를 골라 끊었다. 편도 여행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ㅠㅠ) 그 후로 어찌 될지는 그 누구도, 철 지난 유행어를 쓰자면 '며느리도 모른다'. 말레이시아 무비자 기간이 삼 개월이니 말레이시아가 좋으면 삼 개월 다 채울 있을 수도 있고, 중간에 호주 사는 친구가 보고 싶으면 호주로 갈 수도 있다. 한국에서 세부로, 세부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비행을 이미 두 번이나 하니 되도록이면 육로 이동을 하고 싶은데, 호주로 간다면 배 타는 걸 도전해 볼까? 그레타 툰베리도 요트 타고 뉴욕까지 가지 않았던가? 옵션은 무궁무진하지만 결국 모든 건 우리 주머니 사정에 달려있다. 최종 목적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육로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지나 다시 유럽으로 입성하는 것!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우와~ 하거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지만, 사실 이렇게 ‘무계획'을 괜히 '자유로움'으로 포장해서 떠벌리는 건 불안에 대한 변명이다. 특히 ‘아님 말고’를 지극히 싫어하는 내겐 더욱 그렇다. ‘아몰랑~ 아몰랑~’ 이건 변명이다.



3.

예전엔 역마살을 말할 때 안 좋은 ‘살’로 구분했지만 요즘은 ‘세계인’이라며 긍정적으로 해석해 준다. 좋은 시기에 태어나 팔자도 좋게 봐주는구나. 난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걸 운이 좋았다고 본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난 초등학생이었고, 92학번으로 ‘나’를 중요시하는 이른바 X세대의 물꼬를 틀었고, 그나마 경제 좋을 때 대학 졸업했다. 물론 IMF는 치명적이었지만, 그래도 바로 윗세대 보다 조금의 성공을 꿈꿀 수 있는 마지막 세대다.) 이 역시 역마살에 대한 변명이라 한다면 뭐... 딱히 반박할 논리가 없다.



4.

노마드로서, 떠날 때마다 죄스러웠다. 특히 엄마와 동생에게 그랬다. 이기적으로 내 행복만 찾아 남아있는 사람 생각 안 하고 가는 것 같아서. 떠나면 그만이지, 벌린 일 책임 안 진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어떤 이유로든 떠나는 사람은 떠나는 거리만큼의 무게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다 크리스를 보내고(?) 문득 생각했다. 크리스는 죽음 앞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약혼녀 에이프릴과 평생 자신을 돌봐온 엄마를 두고 갈 것을 생각하며 얼마나 자신의 상황을 책망하고 죄책감에 괴로웠을까. 문득 그가 여전히 하늘에서 먼저 떠났다는 자책에 시달리진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죽으면 끝이라는 내 냉소는 그대로 있다. 하지만 말이다, 나도 인간이다!) 그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가 미안한 게 싫으면 남아있는 우리가 자유로워야 한다. 이런 생각은 날 보내는 사람들도 내가 덜 미안하길 바랄까로 이어졌다. 살짝 마음이 가벼워졌는데, 이 또한 변명일까?



5.

며칠 전, 여러 일정으로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오니 미루가 울고 있다. 놀이터에 나가 놀고 싶었는데 아빠가 같이 안 나가줬댄다. 시간은 이미 밤 7시를 향하고 이렇게 밖이 컴컴한데 지금 가면 같이 놀 친구가 없을 거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미루가 소리친다. 난 말한다.

- 아빠 때문 아니야. 아빠는 일을 하셨어야 했잖아. 상황이 그랬던 것뿐이지 아빠 때문도, 엄마 때문도, 미루 때문도, 그 누구 때문도 아니야.

늦게라도 좋다는 말에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로 간다. 그나마 늦게까지 노는 형제가 있다.

- 너 몇 살이야?

바로 나이 체크하고 가로등 불빛으로 밝혀진 놀이터를 같이 뛰노는 게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문득, 이 놀이터를 본다.

망원1동의 옹달샘 놀이터. 태권도 학원 외에 다른 학원 활동이 없는 미루는 거의 매일 이 곳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너무 더워 밖에서 놀기 힘들었던 한 여름날 빼고는 마치 이 놀이터의 터줏대감처럼 굴었다. 곧 이 놀이터와도 빠이빠이구나. 많이 그리울 거야. 눈에 새기듯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놀이터 구석구석을 흩어본다. 그러다 앞으로 미루에게 세계라는 놀이터가 펼쳐질 거라는 걸 자각한다. 갑자기 떠남의 무게가 훅 다가온다. (우린 홈스쿨링을 할 계획이다.) 미루야, 너 잘할 수 있지? 엄만 네가 그 놀이터에서 무궁무진한 걸 배울 거라 믿어. 이건 결코 괜히 부모로서 미안해서 하는 변명이 아냐. 진짜 이건 변명이 아냐.

같이 놀던 형제가 집으로 간다. 밝은 달빛 아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미루만 있다. 슬슬 우리도 집에 가야겠는데, 아~~ 이대로 가자니 왠지 아쉽다. 그냥 둘이서 데이트나 할까? 미루야, 아빠는 집에서 알아서 차려 먹으라고 하고 우리 돈까스나 먹으러 갈까? 그런데 모기에 물어 뜯긴 내 다리는 우짠댜... 너무 가렵다... ㅠㅠ 나쁜 모기! 미루야, 모기 나빠!



오늘은 여기까지.

아자아아~!! 드디어 썼다!

일요일 벼룩과 어제 대청소로 집을 한 번 뒤엎으니 그나마 끄적일 정신머리가 된다. 물론 아직 처리할 짐들은 내 두통을 유발하지만 그래도 왠지 관장약을 먹은 느낌이다.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의 잡설 #22 - 2019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