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설 #28 - 20191107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부모교육'에 다녀오다.>


1.

안 쓰려고 했는데, 자꾸 생각이 맴돌아 결국 이렇게 앉아 쓴다.



2.

주의: 만약 '엄마는 무조건 아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고 생각하거나, 페미니즘 및 동성애에 반대하시는 분들은 사뿐히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3.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이른바 '부모교육' 강연을 마련했다며 꼭 참석하라길래 그저께 다녀왔다. '부모교육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는 한 교수님이 강연자였다. 누군가 궁금해서 녹색창에 이름을 검색했으나 별다른 걸 찾을 수 없었다. 강연 자체는 육아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새로운 건 없었다. 아이 말을 들어줄 때 어떤 태도로 어떤 말을 써야 하나 등등, 뭐 그런 거. '누가 그걸 몰라서 못 하나', 하는 뭐 그런 거. 그런데 몇 번 팔짱 끼고 한숨을 포옥 쉬게 만드는 말들이 있었다.



4.

강연 시작 전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께서 잠깐 말씀을 하셨는데, 어머님들께 당부 말씀드린다며 하시는 말이...


- (하루가 지난 지라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나지만) 내가 원장 생활을 오래 하며 많은 엄마들을 봤는데, 자신을 희생하고 아이에게 지극 정성 올인하는 엄마들의 아이들은 대부분 잘 되더라. 하지만 뭐 나도 커피 마시고 싶다, 쇼핑하고 싶다 하는 엄마들, 자기 하고 싶은 거 추구하는 엄마들의 아이들은 대부분 잘 안되더라. 그러니 희생하는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 잘 좀 보살펴 달라.


으잉? 좋은 마음으로 왔는데 처음부터 이게 뭐지? 버엉~ 찌며 헛웃음이 났다. 에이, 설마... 그냥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 더 관심 좀 가져주세요'라는 말인 거지? 아니고서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런 '엄마=희생' 공식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어떻게 엄마를 저렇게 이분법으로 갈라? 희생하는 엄마 vs 자아 찾는 엄마로? 그리고 잘 되고 안 되고, 저런 통계는 어디서 나온 거지? 이거 나만 불편한가? 해서 다른 엄마들 반응을 봤는데 나처럼 기막혀하는 엄마들은 안 보였다. (내가 맨 뒷자리에 앉았어서 엄마들 등만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위로하련다.) 바로 강연자를 소개했는지라 뭐라 반박할 새가 없었고, 분위기는 박수 속에 등장한 강연자가 이어받았다. 칫, 원장님 말대로라면, 난 엄마라는 타이틀 외의 자아 성취 욕구가 무지 강한 사람인데, 이제 앞으로 미루는 잘 안 되겠구먼.



5.

강연이 생각보다 지루해서 가끔 터지는 농담에 허허 웃으며 그냥저냥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강연자가 이런 말을 한다.


- (역시나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나지만 대강 이런 톤) 여러분, 요즘은 있잖아요. 꽤 많은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동성애에 찬성을 해요. 서로 막 사귀고 화장실에 가서 막 키스도 하고 그런다니까요. 이래서 어머님들이 지금부터 아이들의 자아와 자존감을 확실히 잡아주고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이렇게 돼요.'


하아~~ 한숨이 포옥 나왔다. 아이고, 아까운 내 시간. 육아에 있어 뭔가 들을만한 조언이 있을까 하여 왔는데, 시작부터 뒤통수 맞더니, "뭡니까 이게~ 원장님 나빠요오~~!" 동성애에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강연자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적인 정치 스탠스를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차별적 발언으로 표현하다니. 빨리 빠져나가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냥 나갈까? 했으나 아이 선생님도 계시고 해서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6.

아이 어린이집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게 상당히 당황스럽다. 미루가 이 어린이 집 다닌 지 벌써 1년이 되어가는데, 원장님 철학이 원래 이랬나? 이 동네에선 그래도 엄마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어린이집이고 그동안 달리 이상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긴, 엄마들이 이 어린이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초등학교 준비를 잘 시켜서니까... 즉, 읽기와 쓰기 훈련을 많이 시켜서 그런 거니까 나랑은 결이 좀 다르겠다. 그래서 미루가 항상 '일이 너무 많아!'라고 하지.) 작년에 건의 사항을 쓰라길래 젠더 교육을 하면 좋겠다고 써서 보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으나 딱히 친한 엄마도 없고, (전에 다녔던 어린이집 엄마들과는 여전히 단톡방에서 소통하지만 이 어린이집에서는 그런 관계가 없다.) 또 뜬금없이 물어보기도 그래서 결국 끝나자마자 빛의 속도로 빠져나왔다.


집에 와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의 '엄마는 페미니스트'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 책 내용에 모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위로가 되었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이런데, 미루가 건강한 페미니스트로 자라려면,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려면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구나... 이제 어쩌나. 건의를 할까 말까? 하아... 요즘 정리다 뭐다 속 시끄러워서 다른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아놔... ㅠㅠ... 남은 한 달, 미루가 아무 탈 없이 어린이집을 마치길.



7.

아니, 엄마가 자아 찾으면 안 되냐고요오오~~ 엄마의 행복이 가족의 행복인 걸, 나아가 사회의 행복인 걸 왜 모르냐고요오오~~ 그렇게 몸 바쳐 희생했는데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 이딴 소리 나오면 그땐 어쩔 거냐고요오오~~ 미루야, 이제 넌 잘 안 되겠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엄마 만난 네 팔자다. 전국의 모든 딸 가진 엄마들, 화이팅!!!



오늘은 여기까지.

허허... 생각할수록 열 받네.

당초 거길 가지 말았어야 했어!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의 잡설 #27 - 2019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