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작년 봄, 난 ‘요즘 뭐해?’란 질문을 받으면 주저할 것 없이 ‘잡초 뽑아!’라고 대답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그때 우린 시댁에서 살았는데 겨우내 느슨했던 정원 관리를 시작하신 시부모님께서 일이 많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시댁의 정원에는 네덜란드어로는 ‘제이븐블라드 (Zevenblad)’, 영어로는 ‘고트위드 (Goutweed)’, 한국어로는 ‘참나물’이라고 불리는 잡초가 정원 전체에 퍼져있었다. 참나물은 그 뿌리가 깊고 얼기설기 넓게 퍼져 있어서 막상 자라야 할 식물들이 제대로 못 자라기 때문에 뽑아야 한다. 자라는 속도도 빨라서 땅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 녀석을 그냥 두면 며칠 사이에 훌쩍 자라 뒤통수를 때린다. 시부모님의 부탁에 소매를 걷었지만 난 그만 단순노동이 주는 무아지경과 뿌리 끝까지 뽑아낼 때의 짜릿함, 그리고 ‘이 구역 잡초는 내가 뽑는다!’란 뚜렷한 목표 의식에 빠져버렸다. 난 시간 날 때마다(솔직히 시간은 따로 낼 필요 없이 넘쳤다) 정원을 어슬렁거리며 잡초를 뽑았고 더 이상 뽑을 잡초가 없으면 왜 없냐며 짜증 냈다. 카밀은 멀쩡한 식물을 왜 뽑냐며 못 뽑아 안달하는 날 한심해했다. 그 시간에 쓸모 있는 (이른바 돈 되는) 일을 하지, 뽑아도 다시 자라는 하나 마나 한 일을 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꽃씨를 뿌렸는데 잡초 때문에 꽃이 제대로 못 자란다면, 그걸 어떻게 눈 뜨고 방치한단 말인가. 과장 조금 보태서 난 잡초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이제는 너무 흔해 식상한 말이 되어버린) 적폐로 보였다. 자라나는 새 생명을 잡아먹는 적폐들이여, 내 기꺼이 정의의 칼날을 뽑으리! 내 허리가 작살나는 건 상관없다, 정의를 구현할 수만 있다면! 안다. 난 과몰입했다.
누구 말마따나 ‘해봤으니 말인데’, 단도진입적으로 말한다. 잡초 뽑기는 웬만한 인내심과 정신 수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잡초를 우습게 보지 말라. 우선 참나물만 보더라도 쉽게 뽑히는 잡초가 아니다. 마치 땅속에서 미꾸라지가 요리조리 헤엄치듯 끝도 없이 길게 뻗어 있는 뿌리에 놀란다. 그 뿌리줄기를 따라 천천히 흙을 걷어 내다가 급한 마음에 확 당겨버리면 그만 줄기는 중간에서 뚝 끊어진다. 이럴 때 난 으악! 비명을 지르며 미쳐버린다. 끝까지 뽑아야 녀석들이 다시 안 자라는데, 이렇게 중간에서 끊어지면 카밀 말대로 하나 마나 한 일이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한번 끊긴 줄기는 다시 찾을 수 없었으니, 피난 통 수많은 인파에 손을 놓쳐 생이별을 하고 마는 이산가족처럼 나머지 줄기는 흙 속으로 사라졌고 난 내 완벽주의를 누르며 미련 없이 다음 참나물로 넘어가야 했다. 작은 참나물도 이런데 내 키까지 올라온 큰 참나물의 뿌리는 어떨까. 잡초 뽑으며 정신 수양을 하게 될 줄이야.
또 하나 고약한 점은, 오늘 다 뽑았다고 자부하면 다음 날 꼭 한두 녀석이 ‘메롱~ 날 못 봤지롱!’ 하며 고개를 뻣뻣이 든다는 거다. 시지프스 신화의 시지프스의 마음을 이해할 정도라면 과장일까.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수정한 후 자신 있게 세상에 내놓은 책에서 다시 오타를 발견하고 교보문고 한복판에서 오열하는 출판사 편집자의 좌절을 이해할 정도라면 과장일까. 자신을 소탕하려는 내게 녀석들이 화합하여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다며 흥분하는 날 카밀은 또 한심하게 바라봤지만 (왜 잡초를 의인화하냐며), 이는 잠재된 내 경쟁심을 건드렸다. 간교한 녀석들, 니들이 날 건드려야? 그려, 니가 이기나 나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고잉. 어차피 난 잃을 게 없당깨. 코로나 땜시 꼼짝없이 여기에 갇힌 나가 뵈는 게 뭐가 있겄쓰. 다 없애주겄쓰! 잡초는 완벽주의와 더불어 내 경쟁심도 끌어냈다.
하지만 내가 잡초에 푹 빠진 진짜 핵심은 이거다. 바로 내 마음을 울렸다는 것. 세상 걱정 잊게 해 주고 연민의 감정까지 끌어올렸다는 것. 종종 난 아련하게 잡초를 보다가 가수 나훈아 씨의 노래 ‘잡초’를 흥얼거렸다. 이게 나만 이런 건지, 아니면 이 노래를 듣고 자란 내 세대가 가진 공통된 감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잡초’라는 단어에 바로 ‘이이~름 모르을~ 잡초야아!’라고 반응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특히 ‘모르을~’ 하고 꺾어지는 부분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잡초’는 그야말로 명곡이다. 리듬도 기깔나고 가사도 기똥차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 이름 모를 잡초야 /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 /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 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 텐데 / 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 텐데 /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자조적인 이 노래는 내 여러 상황에 찰떡처럼 대입된다. 생각해 보라, 지금의 나도 잡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네덜란드란 나라에서 발음이 어렵다며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키 작은 동양 여자’로 분리되는, 코로나 때문에 님에게도 가지 못하는, 무색무취의 이민자이자 이방인인 나. 그러니 어찌 연민이 생기지 않을쏘냐. 분명히 이 녀석도 세상에 나와 쓸모 있고 싶었을 텐데, 하필 태생이 잡초라니. 결코 섞이지 못하고 결국엔 누군가에 의해 추방될 그런 잡초라니. 그런데 난 그런 잡초를 뽑는다. 내가 나를 뽑는 행동을 자각하며, 적폐를 제거하는 개혁 검사이면서도 같은 민족을 배신하는 일제강점기의 밀정이 되는 내 처지의 아이러니에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작년 봄, 난 가열차게 잡초를 뽑았다. 그리고 올해, 다시 봄이 오자 작년의 기억을 잊지 않고 내 몸이 반응했다. 시댁에서 나와 지금 사는 도시로 이사했지만 곧 시부모님이 정원 가꿀 준비를 하실 거라는 걸 알기에 뽑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던 것이다. 어딜 가든 눈에 잡초만 들어왔다. 바야흐로 잡초 타임! 여전히 난 과몰입 중이었다.
‘요즘 뭐해?’란 질문에 ‘잡초 뽑아’란 대답이 시답잖게 보일 수 있다. 꽃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당장은 결과가 보이지 않으니까. 현재 내 활동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체류권을 획득했으니 네덜란드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지만 많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언어가 가로막고 텃세가 가로막고 코로나가 가로막는다. 하지만 난 평소 하던 대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요즘 뭐해?’ 하면 ‘하던 거 해’ 한다. 지금의 내 일은 잡초 뽑기와 같은 걸까? 훗날 필 꽃을 위해 열심히 그 길을 닦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조급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
내 허리가 허락하는 한 계속 잡초를 뽑고 싶다. 잡초 옆에 자라는 가시 돋친 식물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 목장갑을 끼고, 가지런히 걸려 있는 모종삽 중 내 손에 익숙한 삽을 들고 말이다. 난 잡초 뽑기가 좋다. 세상 걱정 다 잊고 무념무상 속에서 단순한 육체노동을 반복할 때 오는 희열과 깨끗한 흙을 볼 때의 성취감이 좋다. 이는 복잡한 현재에서 꼭 필요한 정서적 위로다. 허리를 못 펴고 엉금엉금 길 정도로 몸을 혹사하기 전에 적당한 때를 찾아 멈추는 자제력도 기를 수 있어서 좋다. 때로 약초로도 쓰인다던데, ‘알고 보니 쓸모 있는 녀석이었어! ‘하며 몰랐던 잡초의 가치를 알게 될 때도 좋다. 수많은 역할을 등에 지고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잡초를 뽑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리를 잘 관리해야 하고 체력도 길러야 한다. 매일 마사지 좀 해달라고 조르는 내가 귀찮았는지 카밀은 작년 생일 선물로 미니 마사지 기계를 줬다.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알고 보니 잡초는 내 건강까지 생각하여 사람을 조종하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작년 여름, 시어머니는 내가 참나물을 잘 뽑은 덕에 꽃이 풍성하게 잘 자랐다며 정원에 핀 온갖 꽃 사진을 보내주셨다. 뿌듯했다. 올해 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잡초 뽑기를 못 해 드려서 송구한데, 요즘의 시댁 정원이 어떨지 궁금하다. 내년 봄엔 꼭 뽑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