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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Oct 12. 2022

어디서나 씩씩한 승연 씨

'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날 구성하는 게 무엇일까내 이름은 최승연이고 높을 최(), 정승 ‘()’, 이을 ‘( )’ 자를 쓴다벼슬을 이으라는 조상의 사명을 띠고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소띠 여자다어머니아버지 모두 살아 계시고 밑으로 연년생 남동생이 있다. 150에서 0.3 모자란 149.7cm에서 키가 멈추는 바람에 이 세상 모든 걸 우러러본다아주 가난하지도그렇다고 아주 부자도 아닌아주 보수적이지도그렇다고 아주 진보적이지도 않은아주 오글거리지도그렇다고 아주 건조하지도 않은적당히 평범하고 행복한 집안에서 큰 문제 없이 자랐다그 후 어느 대학에 갔고졸업한 후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했는지 쓸 수 있겠는데살수록 느낀다사람들은 ‘지금을 더 따진다는 걸앞에 내 이름은..’부터 ‘… 자랐다까지 장황하게 쓴 건 필요 없고 됐고그래서 지금 뭐 하냐고?’ 결과치를 요구한다그만큼 지금 하는 일은 자신의 현재 정체성을 규정하는 (혹은 남이 규정하는치명적인 요소다

 

  라떼 타임 좀 가져보겠다. 20대 때 난 아일랜드 록그룹 U2의 공연을 디자인하는 게 꿈이었다. (지금은 방탄소년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이 꿈을 이루려고 뉴욕으로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대학원 졸업 후 난 운 좋게 톰 슈윈(Tom Schiwinn)이란 디자이너의 어시스턴트로 취직했다그는 주로 콘서트방송컨퍼런스 등의 무대를 디자인했는데난 ‘U2까지 가즈아~!’며 창창한 미래를 내다보았다미국의 음악 방송 VH1의 무대를 자주 디자인한 톰 덕분에 본 조비(Bon Jovi), E.L.O, 빌리 아이돌(Billy Idol), 마이클 잭슨 등 이력서에 으스대며 넣기 좋은 유명 뮤지션의 공연에 아트 디렉터로 참여할 수 있었다쉬운 보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자란 영어 때문에 실수도 많이 하고 제작소의 핀잔도 쉴드치며 하나하나 가르쳐 주신 걸 생각하면 참 고마운 분이다

 

  매치박스 20(Matchbox 20)란 밴드의 공연 때 일어난 일이다. 90년대 말에 인기 있던 밴드인데리드 싱어인 로브 토마스(Rob Thomas)가 피처링한 산타나(Santana)의 ‘Smooth’란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확 뜬 밴드다공연 당일고생이 말이 아니었다하필 톰이 심한 독감에 걸려 못 나오는 바람에 나 혼자 독선적이고 건방지기로 유명한 카메라 크루 및 방송사 중역들을 상대해야 했다제작소 사람들은 이미 모든 정보를 줬음에도 자잘한 질문들로 날 괴롭혔고와야 할 세트가 안 와서 그걸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했고불안한지 꽉 막힌 콧소리로 끊임없이 전화하는 톰을 달래야 했다촬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소품 담당 인턴인 우리 편’ 매튜(Mathew)가 소품을 잔뜩 들고 나타났을 땐 너무 반가워 그를 꼬옥 안고 나타나서 고마워를 남발했다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던 그의 표정이 기억난다.   

 

'매치박스 20'은 아니지만, 톰이 디자인한 본 조비 공연. 내가 스케치 했다.


  이날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경험이었다어찌어찌하여 셋업이 마무리되고 공연이 시작됐는데몇 곡의 노래를 부른 후에야 스멀스멀 핏줄을 타고 이상한 깨달음이 온몸에 퍼졌다바로 밴드를 포함해 관객 및 공연에 참여한 모든 스탭까지나 빼놓고는 모두가 백인이라는 깨달음흑인도라틴계도동양계도한 마디로 유색인종은 나밖에 없었다뒤에서 봐야 했으므로 분명 내 착각이었을 거다게다가 뉴욕 아닌가다양성 하면 1등인 도시인데그 공간에서 유일한 유색인종이라니하지만 그때 내 눈엔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인종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음악은 들리지 않았고난 호리병의 물을 마시고 갑자기 쏘옥 작아져 버린 앨리스가 되었다혼자 적막의 세상으로 까마득히 떨어진너무 작아서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에게도 목소리가 닿지 않는 작디작은 앨리스가왜였을까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건만 난 이유 없이 스스로 작아져 버렸다하얗고 하얀 쌀밥 위에 뚝 떨어진 코피 한 방울 같은, ‘마이노리티(minority)’, 즉 소수란 게 무엇인지 뼈저리게 자각했던 그 강렬했던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공연이 끝나고 무대 철거까지 다 끝난 난 후에야 코피 한 방울이 더 떨어졌다스튜디오를 청소하려고 들어온 키 큰 흑인 어르신이었다

 

  이게 2001년도니까 근 20년 전의 일이다하지만 이런 일은 지금도 벌어진다예를 들어 작년 가을 카밀이 그의 시집을 출간한 소규모 출판사를 대표해 부스를 얻어 참가했던 시문학의 밤(Nacht van de Poezie)’이란 시 낭송 공연 행사만 해도 그렇다무대에서 시 낭송을 했던 19명의 시인 중 단 1명만 빼고 모두 백인이었다중간에 공연했던 6팀의 음악 공연도 한 팀만 월드 뮤직이었다구색 갖추기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행사에 온 관객이나 문학 관계자들도 거의 백인이어서 가끔 보이는 동양인이나 흑인을 손으로 세어야 했다난 씁쓸히 입맛을 다시며 카밀에게 말했다

  - Wow… this is so... WHITE! (이야... 이거 너무... 하얗잖아!) 

  문학이라서 그랬을까이민자 문학은 최근에서야 주목받기 시작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전체 인구 1,728만 명 중 약 20퍼센트 이상이 이민자인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19명 중 단 한 명이라는 숫자는 참 아쉬웠다그때 내가 속한 사회의 모습을 톡톡히 자각했다아이를 등하교시킬 때슈퍼마켓에서 장을 볼 때시내나 공원을 산책할 때와 같은 좁고 좁은 일상 밖확장된 사회의 모습과 그 속에서의 내 위치를. ‘그래이런 거였지여전히 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던 거지.’ 순간 확 겁이 났다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내가 앞으로 헤쳐가야 할 상황이 그려졌다이곳 예술 학교 출신도 아니고언어도 안 통하고융복합이니 뭐니 미래지향적 예술이 각광받는 시대에 고리타분한 풍경 그림을 그리고젊은 라이징 스타도 아닌 기댈 곳 하나 없는 50대 아줌마가첩첩이 쌓인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창작을 이어가며 내 위치를 찾을 수 있을까한숨이 폭 나오며 행사를 즐길 흥을 잃어버렸지만 이상한 오기에 꽉 쥐어지는 내 주먹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시스템에서 단단히 자리 으신 모든 이민자 분들께 의를 표한다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처절한 싸움을 하셨을 거다그리고 그 싸움은 현재 진행형일 거다나 역시 싸움을 치를 준비를 한다. U2 무대를 디자인하겠다는 일념으로 뉴욕 생활을 했던 것처럼 그때의 욕망이 다시 솟아오른다

  ‘우주 보안관 장고란 애니메이션이 있다나먼 우주의 나라 뉴 텍사스에서 신비의 케륨 광석을 리는 우주의 악마를 물리치며 보안관 장고가 외쳤

  - 곰 같은 이여 아라표범처럼 날쌔거라늑대의 귀로 들어라매의 눈으로 보아라

  지금 외친다곰의 힘과 표범의 날쌤과 늑대의 귀와 매의 눈을 장착하고서 내 주변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분석하여 내 작품으로 살아남겠다고그래서 누군가 됐고지금 뭐 하는데?’라고 물으면 어디서든 씩씩하게 ‘창작합니다라고 대답하겠다고그래서 웹사이트부터 만들었다사이트의 주소는 yeonyellowduckchoi.com이다시간 되실 때 확인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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