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날 구성하는 게 무엇일까? 내 이름은 최승연이고 높을 최(崔), 정승 ‘승(丞)’, 이을 ‘연(延 )’ 자를 쓴다. 벼슬을 이으라는 조상의 사명을 띠고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소띠 여자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살아 계시고 밑으로 연년생 남동생이 있다. 150에서 0.3 모자란 149.7cm에서 키가 멈추는 바람에 이 세상 모든 걸 우러러본다. 아주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부자도 아닌, 아주 보수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진보적이지도 않은, 아주 오글거리지도, 그렇다고 아주 건조하지도 않은, 적당히 평범하고 행복한 집안에서 큰 문제 없이 자랐다. 그 후 어느 대학에 갔고, 졸업한 후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했는지 쓸 수 있겠는데, 살수록 느낀다. 사람들은 ‘지금’을 더 따진다는 걸. 앞에 ‘내 이름은..’부터 ‘… 자랐다’까지 장황하게 쓴 건 필요 없고 ‘아, 됐고, 그래서 지금 뭐 하냐고?’ 결과치를 요구한다. 그만큼 ‘지금 하는 일’은 자신의 현재 정체성을 규정하는 (혹은 남이 규정하는) 치명적인 요소다.
라떼 타임 좀 가져보겠다. 20대 때 난 아일랜드 록그룹 U2의 공연을 디자인하는 게 꿈이었다. (지금은 방탄소년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꿈을 이루려고 뉴욕으로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대학원 졸업 후 난 운 좋게 톰 슈윈(Tom Schiwinn)이란 디자이너의 어시스턴트로 취직했다. 그는 주로 콘서트, 방송, 컨퍼런스 등의 무대를 디자인했는데, 난 ‘U2까지 가즈아~!’며 창창한 미래를 내다보았다. 미국의 음악 방송 VH1의 무대를 자주 디자인한 톰 덕분에 본 조비(Bon Jovi), E.L.O, 빌리 아이돌(Billy Idol), 마이클 잭슨 등 이력서에 으스대며 넣기 좋은 유명 뮤지션의 공연에 아트 디렉터로 참여할 수 있었다. 쉬운 보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자란 영어 때문에 실수도 많이 하고 제작소의 핀잔도 쉴드치며 하나하나 가르쳐 주신 걸 생각하면 참 고마운 분이다.
매치박스 20(Matchbox 20)란 밴드의 공연 때 일어난 일이다. 90년대 말에 인기 있던 밴드인데, 리드 싱어인 로브 토마스(Rob Thomas)가 피처링한 산타나(Santana)의 ‘Smooth’란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확 뜬 밴드다. 공연 당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하필 톰이 심한 독감에 걸려 못 나오는 바람에 나 혼자 독선적이고 건방지기로 유명한 카메라 크루 및 방송사 중역들을 상대해야 했다. 제작소 사람들은 이미 모든 정보를 줬음에도 자잘한 질문들로 날 괴롭혔고, 와야 할 세트가 안 와서 그걸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했고, 불안한지 꽉 막힌 콧소리로 끊임없이 전화하는 톰을 달래야 했다. 촬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소품 담당 인턴인 ‘우리 편’ 매튜(Mathew)가 소품을 잔뜩 들고 나타났을 땐 너무 반가워 그를 꼬옥 안고 ‘나타나서 고마워’를 남발했다.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던 그의 표정이 기억난다.
이날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경험이었다. 어찌어찌하여 셋업이 마무리되고 공연이 시작됐는데, 몇 곡의 노래를 부른 후에야 스멀스멀 핏줄을 타고 이상한 깨달음이 온몸에 퍼졌다. 바로 밴드를 포함해 관객 및 공연에 참여한 모든 스탭까지, 나 빼놓고는 모두가 백인이라는 깨달음. 흑인도, 라틴계도, 동양계도, 한 마디로 유색인종은 나밖에 없었다. 뒤에서 봐야 했으므로 분명 내 착각이었을 거다. 게다가 뉴욕 아닌가. 다양성 하면 1등인 도시인데, 그 공간에서 유일한 유색인종이라니! 하지만 그때 내 눈엔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인종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음악은 들리지 않았고, 난 호리병의 물을 마시고 갑자기 쏘옥 작아져 버린 앨리스가 되었다. 혼자 적막의 세상으로 까마득히 떨어진, 너무 작아서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에게도 목소리가 닿지 않는 작디작은 앨리스가. 왜였을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건만 난 이유 없이 스스로 작아져 버렸다. 하얗고 하얀 쌀밥 위에 뚝 떨어진 코피 한 방울 같은, ‘마이노리티(minority)’, 즉 ‘소수’란 게 무엇인지 뼈저리게 자각했던 그 강렬했던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철거까지 다 끝난 난 후에야 코피 한 방울이 더 떨어졌다. 스튜디오를 청소하려고 들어온 키 큰 흑인 어르신이었다.
이게 2001년도니까 근 2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지금도 벌어진다. 예를 들어 작년 가을 카밀이 그의 시집을 출간한 소규모 출판사를 대표해 부스를 얻어 참가했던 ‘시문학의 밤(Nacht van de Poezie)’이란 시 낭송 공연 행사만 해도 그렇다. 무대에서 시 낭송을 했던 19명의 시인 중 단 1명만 빼고 모두 백인이었다. 중간에 공연했던 6팀의 음악 공연도 한 팀만 월드 뮤직이었다. 구색 갖추기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행사에 온 관객이나 문학 관계자들도 거의 백인이어서 가끔 보이는 동양인이나 흑인을 손으로 세어야 했다. 난 씁쓸히 입맛을 다시며 카밀에게 말했다.
- Wow… this is so... WHITE! (이야... 이거 너무... 하얗잖아!)
문학이라서 그랬을까? 이민자 문학은 최근에서야 주목받기 시작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전체 인구 1,728만 명 중 약 20퍼센트 이상이 이민자인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19명 중 단 한 명이라는 숫자는 참 아쉬웠다. 그때 내가 속한 사회의 모습을 톡톡히 자각했다. 아이를 등하교시킬 때, 슈퍼마켓에서 장을 볼 때, 시내나 공원을 산책할 때와 같은 좁고 좁은 일상 밖, 확장된 사회의 모습과 그 속에서의 내 위치를. ‘그래, 이런 거였지, 여전히 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던 거지.’ 순간 확 겁이 났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내가 앞으로 헤쳐가야 할 상황이 그려졌다. 이곳 예술 학교 출신도 아니고, 언어도 안 통하고, 융복합이니 뭐니 미래지향적 예술이 각광받는 시대에 고리타분한 풍경 그림을 그리고, 젊은 라이징 스타도 아닌 기댈 곳 하나 없는 50대 아줌마가, 첩첩이 쌓인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창작을 이어가며 내 위치를 찾을 수 있을까? 한숨이 폭 나오며 행사를 즐길 흥을 잃어버렸지만 이상한 오기에 꽉 쥐어지는 내 주먹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시스템에서 단단히 자리 잡으신 모든 이민자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처절한 싸움을 하셨을 거다. 그리고 그 싸움은 현재 진행형일 거다. 나 역시 싸움을 치를 준비를 한다. U2 무대를 디자인하겠다는 일념으로 뉴욕 생활을 했던 것처럼 그때의 욕망이 다시 솟아오른다.
‘우주 보안관 장고’란 애니메이션이 있다. 머나먼 우주의 별나라 뉴 텍사스에서 신비의 케륨 광석을 노리는 우주의 악마를 물리치며 보안관 장고가 외쳤다.
- 곰 같은 힘이여 솟아라! 표범처럼 날쌔거라! 늑대의 귀로 들어라! 매의 눈으로 보아라!
지금 외친다. 곰의 힘과 표범의 날쌤과 늑대의 귀와 매의 눈을 장착하고서 내 주변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분석하여 내 작품으로 살아남겠다고. 그래서 누군가 ‘됐고, 지금 뭐 하는데?’라고 물으면 어디서든 씩씩하게 ‘창작합니다’라고 대답하겠다고. 그래서 웹사이트부터 만들었다. 사이트의 주소는 yeonyellowduckchoi.com이다. 시간 되실 때 확인 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