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2020년 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수신자는 나, S.Y Choi였고 발신자는 IND, 즉 네덜란드 이민국이었다. 그 편지를 받은 날짜로부터 약 6개월 전, 난 네덜란드에서 장기 체류를 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한 바 있다. 봄쯤 결과를 통보하는 편지를 받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발신자 이름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난 편지를 바로 뜯지 못하고 수신자에 쓰인 내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Mevrouw (Madam) S.Y Choi… 약자로 쓰인 내 이름이 참 작아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레 편지를 뜯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드럼 소리가 날 어지럽게 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형식적으로 시작된 편지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질문은 이랬다.
- Kunt u uitleggen wat er in het leven van uw kind verandert als u geen verblijf in Nederland wordt toegestaan?
이 문장을 한 자 한 자 번역기에 쳤다. 그러자 이렇게 나왔다.
- Can you explain what will change in your child's life if you are not allowed to stay in the Netherlands? (만약 당신의 네덜란드 체류가 거부된다면 당신 자녀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설명할 수 있나요?)
단어 하나하나가 내 머리를 쾅쾅 때렸다. 이 문장을 읽은 짧은 1초 동안 수많은 감정들이 내 심장을 두들겼다. 놀라움, 당황스러움, 황당함, 어리둥절함, 의아함, 어이없음, 모욕감, 분노, 슬픔, 서러움, 짜증… 편지의 끝엔 따로 명시된 추가 서류와 함께 위의 질문에 답을 작성하여 2주 안으로 보내라고 쓰여있었다. 난 허리를 쭉 펴고 쓰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밖에서 카밀이 들어왔다. 난 그에게 편지를 넘겼고, 5초 후 그는 이게 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드디어 비자라는 장벽을 마주한다. 항상 ‘나중에’란 카테고리에 깊숙이 쑤셔 넣고 애써 모른 척한 벽을 마주하고 넘어야 한다. 손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여권만 흔들면 어디든 통과하던 ‘여행자의 자유’를 버리고 모두가 당연시하는 ‘거주자의 안정’을 지난한 절차를 거쳐 취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 가족은 찢어지니까. 네덜란드 국적이 있는 남편과 아이를 두고 한국 국적의 나 혼자 모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기약 없이 카밀을 ‘당분간 아내 없는 남편’으로, 미루를 ‘당분간 엄마 없는 아이’로 두어야 하니까. 다문화 가족은 공권력에 의해 너무나 쉽게 찢어질 수 있는 불안정한 형태의 가족이다. 그리고 그 공권력은 상상외로 폭력적이다. 가족이 찢어지는 불행을 피하려면 그 폭력을 견뎌야 한다.
2020년 여름, 코로나가 세상을 정복한 상황에서 더 이상 여행할 수 없는 우리 가족이 장기적으로 지낼 수 있는 나라는 사지선다의 예보다 적었다. 결국 한국이냐 네덜란드냐 둘 중 하나였는데, 고민 끝에 네덜란드를 택했다. 내가 취득할 수 있는 비자는 네덜란드 국적을 가진 아이의 부모로서 체류할 수 있는 가디언 (Guardian) 비자, 즉 부모 비자를 신청하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자식 덕을 보나? 미루야, 네가 벌써 효도하는구나. 준비해야 할 서류는 출생증명서, 가족관계 증명서, 추천서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결국 논지는 하나였다.
-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임을 증명하시오. 그리고 아이의 양육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시오.
예시가 있었다. 출생부터 지금까지 같이 지낸 시간을 증명하는 사진들, 아이의 원만한 학교생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학교의 추천서, 예방접종 증명서 등등… 행정적으로 어쩔 수 없는 절차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이 상황이 억울하고 슬프기만 했다. 우린 그저 가족으로서 같이 있고 싶을 뿐인데!
난 하드 드라이브에 잠자고 있는 사진을 꺼냈다. 미루와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출산 후 퉁퉁 부은 몸으로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의 모습, 조리원에서 미루에게 젖을 물리고 승리의 브이 자를 그린 모습, 미루와 노래 부르며 길을 걷는 모습… 난 잠시 애초의 목적을 잊고 추억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진을 즐겼다. 그래, 이랬었지. 이런 시절이 있었지. 항상 카메라 뒤에서 셔터를 누르는 사람은 나였기에 의외로 나와 미루가 함께 있는 사진은 적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순간을 나눈 사진은 충분했다. 사느라 바빠 잊었던 나와 미루와의 시간을 이렇게 되짚게 되다니, 이런 게 이민국의 순기능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깨달은 건 이거였다. ‘결국 남는 건 사진이다!’
준비 과정은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한국으로부터 특급 배송으로 서류를 받자니 돈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귀찮고 짜증 났지만 차곡차곡 준비했고 수신자 칸에 이민국이라고 쓰인 봉투를 조심스레 우편함에 넣었다. 그리고 곧 6개월 후에 결과를 받을 거라는 편지를 받았다.
자, 6개월이 지났다. 이제 그들은 내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 만약 당신의 네덜란드 체류가 거부된다면 당신 자녀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설명할 수 있나요?
뭐 이런 질문이 다 있어? 하고 버럭 화를 낼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건 꽤 철학적인 질문이다. 당연시하는 부모 자식 관계의 클리셰를 비틀어 좀 더 냉정하게 분석하라고 한다. 그래, 한번 생각해 보자. 체류가 거절되어 나 혼자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과연 미루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우선 카밀이 경제 활동과 더불어 학교 및 모든 육아를 책임져야 하니 그 부담이 엄청날 거다. 작지만 중요한 일들을 못 챙길 거고 아이의 마음을 제때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도움이 필요할 텐데, 시부모님이나 주변으로부터 얼마만큼의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미루는 엄마를 그리워할 거고 그건 아이의 정서에 좋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나면 아이의 삶은 180도 달라진다. 이건 매우 자명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글로 써야 한다니… 하지만 이건 세계 모든 이민국에서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절차다. 난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이민국이 내게 부모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거라고. 이민국은 원래 재수 없는 곳이고 이건 그저 생색에 불과하니 대인배의 마음으로 못 이기는 척 맞장구치자고. 우린 다시 추가 서류 및 답변을 완성하여 봉투에 넣고 이민국으로 보냈다. 우편함에 넣으며 난 중얼거렸다.
-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그로부터 한 달 후 난 5년짜리 부모 비자 취득을 통보하는 편지를 받았다. 가까운 이민국 사무실에 예약했고 신분 확인을 했고 지문 채취를 했고 사진을 찍었고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크기와 비슷한 플라스틱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신분증을 건네는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Welcome to the Netherlands’라고 말했고 난 고맙다는 말 대신 미소를 보냈다. 집에 오자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쏟아져 바로 낮잠을 잤다. 오래 자고 싶었지만 커피가 절실해서 일어났다. 커피를 뽑은 후 식탁에 앉아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요리조리 돌려봤다. 허허… 요 작은 걸 받기 위해 그 생쑈를 했단 말이지… 신분증에 빛이 반사되자 무지개색이 되었다. 학교에서 미루가 돌아왔다. 아이는 오자마자 엄마! 하며 내 품에 쏙 안겼다. 아이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껴며 부비부비 뽀뽀한 후 난 미루에게 물었다.
- 미루야. 엄마가 미루 엄마 맞지? 그리고 미루는 엄마 딸이지?
미루는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당연하지! 왜?
- 아니야.
- 왜에~?
-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 사랑해 미루야.
- 나도 엄마 사랑해.
네덜란드가 날 받아주기까지 근 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단, 조건이 있다. ‘미루의 엄마’라는 조건.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난 이 나라에서 지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조건을 충족하는지 판단할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이다. 미루가 다시 날 꼬옥 안았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래, 다른 것 필요 없다. 비자고 뭐고 ‘엄마 사랑해’ 이 대답 하나만으로 난 이 조건을 충족한다. 난 이 아이의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