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4일
2022년 9월 4일
오늘 알고 보니 덴보스를 대표하는 세인트 얀스 성당 옆 광장에서 아트 페어가 열렸다.
위의 문장에서 ‘알고 보니’가 중요하다.
어제 긴급하게 카밀과 미루가 야외무대 시 낭송을 제안받았길래 그냥 문학 이벤트이거니 했는데
가서 보니 근 백 개의 부스에 아티스트들이 자기 작품들을 전시하고 파는 아트 페어였던 것이다.
아트 페어란 사실을 인식한 순간,
- 어머, 왜 이걸 몰랐지? 진작 알았더라면 나도 참가해서 내 그림을 가져 와 팔았을 텐데!
라는 깊은 탄식이 나왔다.
그리고 자책이 밀려왔다.
도대체 이걸 왜 모른 거야?
조금만 정신 차렸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이게 여기서 예술 활동을 하겠다는 사람의 태도야?
맨날 혼자 작업하기 외롭다 징징거리면서 이런 행사가 있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물론 네덜란드어 때문에 주저하는 점도 있지만 이들이 영어를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현재 내가 그린 그림의 개수로 충분히 부스 하나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작은 도시의 아트 페어에서 그림을 팔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고 현장 경험치를 쌓을 수 있지 않은가!
그림보다는 글쓰기에 집중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글에 대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아트 페어를 놓치다니, 왠지 모를 실패감에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내 노오오오~~~력은 어디로 갔나.
그래도 카밀과 미루의 시 낭송은 즐겨야겠기에
마음을 진정하고 광장 중앙에 위치한 작은 무대에 선 그들에게 집중했다.
카밀과 미루는 이미 12시부터 띄엄띄엄 총 3번의 낭송을 한 상태였고
난 일이 있어서 늦은 오후에나 도착했기 때문에 마지막 낭송을 봤는데,
카밀 말로는 앞에 했던 낭송들이 모두 좋은 호응을 얻었다고 했다.
비디오로 찍어뒀어야 했는데 아쉽다.
쭉 돌아다니며 작품들을 보았다.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작품들이 눈에 띄어서 오호~ 했다.
부스의 위치와 아티스트들을 나열한 브로셔를 보니
한국인 여성 이름이 하나 있길래 그 부스로 갔는데 다른 아티스트가 있었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바로 구글로 검색하니 그녀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보였고
mutual friends도 4명이나 있었다.
모두 네덜란드에서 거주하는 교민들이었다.
주저할 것 없이 바로 친구 신청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나 같은 듣보잡은 스스로 에이전시가 되어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시 낭송 때문에 밖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네덜란드에 온 후 집순이가 돼버린 난
분명 이런 행사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좀 더 얼굴에 철판 깔고 적극적으로 나가자.
아줌마 정신 특유의 뻔뻔함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카밀은 참가하려면 돈도 내야 하고 많이 팔지도 못했을 거라며
날 달래는 말을 했지만
앞으로 이런 기회를 흘리는 일은 없도록 하자.
글 쓰는만큼 그림에도 더 신경을 쓰자.
카밀과 미루의 시 낭송 후 발칸 집시 음악을 하는 밴드가 올라와 근 30분간 공연을 했다.
서서히 난 고개를 까닥이며 축제 분위기에 젖어 들었고
상쾌한 햇볕 아래 내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정말 다양한 체형의 사람들이 다양한 패션을 자랑하며 오갔다.
특히 각양각색 어르신들의 패션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아트 페어엔 젊은 친구들보다는 어르신들이 많이 온다)
순간 지하철 3호선 어르신들의 북한산 등산복 패션이 생각나서 키득거렸다.
이들을 보며 유럽의 비만 인구가 코로나 이후 얼마나 증가했는지
통계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걷기 운동하겠다고 어제 일기에 썼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어나니 9시 반... ㅜㅜ
이쯤 되면 아침 운동은 개뿔! 하겠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내일이 미루 개학 날인 것이다!
미루를 등교시키려면 어차피 7시에는 일어나야 하고
학교 데려다준 후 바로 운동하러 갈 수 있으니
내일은 분명 운동할 수 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걸으며 허리를 달래자.
자, 부활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