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8일
2022년 9월 8일
미루는 유니콘에게 ‘린지’란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어젯밤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자 아니나 다를까 미루가 달려와 비 맞으면 안 된다며 린지를 번쩍 들어 베란다에서 거실로 옮겼다.
그리고 정성스레 수건으로 빗물을 닦았다.
(그렇다, 예고했듯이 난 여전히 유니콘에 대해 쓰고 있다)
그 후로 비가 멈췄음에도 린지는 아직도 거실을 다 차지하고 마치 강아지가 바닥에 앉아 혀를 내밀고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며 헐떡이듯 앉아있다.
일기 예보를 보아하니 앞으로 계속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듯한데,
그렇다면 린지는 베란다가 아닌 이 거실에 계속 있을 것이다.
카우치에 앉아 일기를 쓰는 지금도 내 앞에서 떡하니 버티고 앉아 그 검은 눈을 부라리는데...
하아... 이거 좀... 질린다.
어찌 된 게 이 거대한 녀석의 존재에 압도당하는 사람은 이 아파트에서 나밖에 없다.
미루는 린지를 자랑하고 싶어서 방과 후 친구를 데려왔고,
유니콘 하나로 월드 쿨리스트 대디가 된 카밀은 그 타이틀을 자랑하고 싶어서 내일 또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
환상의 짝궁 앞에서 나만 쿨하지 못 한 사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난 ‘쿨하지 못해 미안하’지 않다.
작지만 햇볕이 잘 드는 이 아파트를 난 꽤 좋아하는데, 이거 이 녀석 때문에 큰 공간을 갈망하게 생겼다.
내일도 또 린지에 대해 쓰려나.
오늘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종일 책을 읽었다.
이렇게 종일 책을 읽은 게... 언제였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오랜만이다.
아니, 평생 그런 적이 있긴 있었나?
점심 먹고 책을 읽을 땐 카우치의 포근함 때문에 1시간 정도 살짝 졸기도 했다.
난 여러 책을 번갈아 가며 동시에 읽는 못된 독서 버릇이 있는데,
오늘은 웬일로 소설 하나에 집중하고 있다.
속도감 있게 술술 읽히는 책이어서 만약 내 독서 속도가 빨랐다면 상, 하권 중 상권은 벌써 끝냈을 거다.
책을 읽으며 묘사보다 서술에 더 집중하는 내 문체는 에세이보다 소설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쓰고 싶은 소설 아이템이 하나 있긴 한데, 어디까지나 아이디어일 뿐 이걸 어떻게 스토리로 발전시킬지 감도 안 잡히고 엄두도 나질 않아 안 쓰고 있다.
소설 작법서라도 봐야 할까?
계속 책을 읽으니 미루가 옆에서 와서는,
엄마아~~ take a break! You need to reeeeeest...라고 하는데,
얘야, 난 네가 내 컴퓨터로 디즈니 플러스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술수라는 걸 잘 알고 있단다.
엄마처럼 옆에서 책을 읽으렴,
하고 말을 하려는데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훤히 안다는 듯, 녀석은 재빨리 내 앞에서 사라진다.
칫, 부모가 책 많이 읽으면 자식도 책 읽는다는 말, 그거 다 거짓말이야.
미루야, 이왕 가려면 린지도 같이 데리고 가주렴.
아,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은 '보니 가머스'란 작가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Lessons in Chemistry)'이다.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읽고 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잠시 독서를 멈추고 페북 담벼락을 쭉 스크롤 하는데, 영국 여왕 서거 뉴스가 있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떠들썩하겠구나.
빗줄기가 창을 때린다.
한 세기가 막이 내릴 때 비가 오고 있다.
#일기 #이방인일기 #유니콘 #독서 #네덜란드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