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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Sep 14. 2022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13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13일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13


2022년 9월 13일 


오늘 아침, 미루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와서 이메일을 확인하니 거절 메일 하나가 살포시 앉아있다.

6번째 거절 메일이다. 

내용은 비슷하다. 

회의를 거쳐 성심껏 검토했으나 본사의 방향과는 차이가 있어 정중히 반려한다.

뜻이 맞는 인연을 만나 건승하길 바란다.

차라리 ‘수고는 갸륵하나 네 거 별로니까 안 할래’라고 대놓고 말해주면 상처야 받지만 내 콘텐츠를 재검토할 수 있으니 그나마 나은데, ‘혜량’이란 단어까지 쓰며 돌려 돌려 극존칭의 예의를 갖추면 받는 사람 입장에선 참 뻘쭘하다. 

'정중히 반려드리오니 혜량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칫, 이런 사극톤의 애매한 상처라니. 

'예에~ 저하. 소인 비록 미천한 듣보잡이오나 더욱더 정진하겠사옵니다~'

어찌 된 게 6개의 회사 모두 ‘성심껏 검토했으나 방향이 다르’냐? 

그래도 아예 답이 없는 것보다는 거절 메일이라도 받는 게 낫다. 

카피 페이스트라 하더라도 시간을 들여 써준 거니까.

앞으로 이런 메일이 더 올 텐데, 무뎌지겠지만 공허함은 산이 되겠지. 

내 글이 상업성이 없다는 건 진작에 아는 사실이나 그래도 나름 고집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버텼는데, '이건 아니다' 딱 인정하고 방향을 돌려야 할 때가 된 걸까?

세상은 과정이 어떻든 결과로 모든 걸 말한다. 

결과가 좋으면 신념이라 하고, 나쁘면 똥고집이라 하니까.

과연 나의 버팀은 신념이 될까, 똥고집이 될까?

사실 카밀과 지금 누가 누가 더 많이 거절당하나 내기 중인데, 현재 스코어 3대 6이다. 

카밀이 3, 내가 6. 지고 있다. 아니, 이기고 있는 건가? 

카밀은 20번째 거절을 받으면 네덜란드를 떠나자고 한다. 

혹자는 일기라지만 SNS에 올리니 다 보라는 글일 텐데, 왜 그리 찌질한 내용을 올리냐고 한다. 쪽팔리지 않냐고. 

뭐 SNS는 원래 그럴싸한 걸 올리는 곳이니 그런 말 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그런데, 미안하다. 나 별로 안 쪽팔려. 

나 관종이거덩. 몰랐니?  


거절 메일 밑에는 ‘테레즈 니나 부인(Mrs. Therese Nina)’ 명으로 보낸 메일도 하나 있었으니, 바로 닳고 닳은 범세계적 레파토리의 메일.

즉, 배우자가 죽으며 남긴 엄청난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데 (착한 사마리아인 납셨네!) 난 자식도 없고 또 병으로 아프기 때문에 당신에게 이 일을 맡기고자 한다. (뭔 근거로?) 돈을 당신 계좌로 이체하고 싶으니 ‘긴급히’ 답해달라. (Urgent! Urgent! Urgent!)

어찌하여 이 레파토리는 몇십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까?

친절하게 한국어로 번역까지 해서 보냈는데, 구글 번역기로 돌린 게 너무 티가 나서 애잔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구글도 발전하는지, 예전엔 못 봐줄 정도로 엉망이었는데 이젠 제법 그럴듯한 문장이 나온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이구나. 

피식이며 읽을 수 있는, 더불어 애잔함까지 줄 수 있는 웃긴 글. 

바로 안 지우고 그냥 남겨뒀다. 

나중에 보고 또 웃을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거절 메일과 엄청난 유산을 내게 넘기겠다는 이게 웬 떡이냐 메일을 받은 기념으로 오늘 난 종일 그림을 그렸고, 

넷플릭스에서 쉥 왕(Sheng Wang)의 스탠드 업 코메디를 봤고, 

박상영 작가의 ‘믿음에 대하여’란 소설을 읽기 시작했으며

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미루의 요구에 발맞추어 만든 카밀의 연어 스테이크를 저녁으로 맛있게 먹었다.

일기도 쫓겨서 안 쓰고 10시 전에 이렇게 여유 있게 쓰고 있으니, 썩 괜찮은 9월 13일 화요일이었다.


#일기 #이방인일기 #거절 #스팸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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