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글 제목을 ‘내 집은 어디인가?’로 정하니 제대로 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너무 본질적이고 답이 없는 질문이니까. 이 질문은 여행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언제까지 여행할 거야? 어디서 정착할 거야? 결국 모두 같은 질문이다. 즉, ‘어디서 살 거야?’
다들 이렇게 묻는데, 솔직히 난들 알겠는가? 그 답을 제일 알고 싶은 사람은 묻는 사람이 아닌 당사자 나 아니겠는가. 나도 궁금하다. 과연 어디서 살게 될지. 계속 네덜란드에서 살게 될지. 일전에 포르투갈에서 만난 한 프랑스 가족은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땅 사진을 보자마자 ‘여기가 우리 집이다!’라고 느꼈단다. 실제로 본 것도 아니고 그저 화질 나쁜 사진 한 장을 봤을 뿐인데, 하늘이 열리고 천상의 그분께서 손수 콕 집어 점지해 주신 것처럼 확신이 들었고 바로 모든 걸 정리하고 포르투갈로 내려와 그 땅을 사서 7년 넘게 가꾸고 있다고 했다. 아하, 장소도 첫눈에 반할 수 있구나.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겠지? 그래서 기다렸다. 땅 본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다렸다. 그런데… 안 오더라. 기다려도 안 와. 기다리기 싫어서 찾아다녀도 안 와. 뭐야, 이거 사람 가리며 오는 거야? 나한텐 왜 안 와? 자격이 안 돼? 재수 없네! 난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 내 집은 어디인가?
당신은 살면서 진지하게 이 질문을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신의 계시에 대한 헛된 바람을 안겨준 프랑스 가족처럼 ‘여기다!’라고 강하게 느낀 적이 있는가? 대부분은 직장에 의해, 학업에 의해, 혹은 경제 사정에 의해 사는 곳을 결정한다. 이런 외부적 요건은 비록 자발적이 아닐지라도 결정 자체를 쉽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반면 고정된 직장 없이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우리는 이런 요건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자유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이건 마치 백화점의 장난감 진열대 앞에서 엄마가 준 오천 원을 손에 꼭 쥐고 너무 많은 장난감 중 무엇을 선택할지 몰라 쩔쩔매는 꼬마와도 같다.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되는 만큼 꼭 여기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여기다!’란 신의 계시가 온다고 해도 쉽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가끔은 결정을 쉽게 해주는 어떤 사건이 생기면 좋겠다는 허무한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는 사양한다.)
단일 민족을 강조하는 80년대 공교육을 받은 난 어릴 때 이렇게 생각했다. 나라마다 하나의 민족이 살고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한국에서 한국인이 한국어로 말하며 살듯 모든 나라가 그럴 거라고. 한 나라 안에 여러 종족이 다른 언어를 쓰며 살거나, 한 언어를 여러 나라에서 쓴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백인, 흑인 외의 다른 인종이 있는지도,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 국가 외에 수많은 국가가 있는 지도,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이야 유치원생도 만국기를 외우고 유튜브만 열면 지구촌 곳곳을 볼 수 있는 손바닥 세상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을 보기란 쉽지 않았으니 내가 알던 세상은 참 작고도 작았다. 2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얼마나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지 알았고, 30대 후반, 카밀과 세계를 여행하며 비로소 얼마나 내가 세상에 무지한 채 좁은 성 안에서 살았는지 깨달았다. 세상은 공부할 것투성이었고 공부하면 할수록 어려웠다. 난 종종 게을렀고 그만큼 무지는 쌓였다. 그 무지가 싫어서 돌아다녔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내 여행의 시작은 자기혐오였는지도 모르겠다. 싫은 내 모습을 만회하기 위해 ‘집’ 찾는다는 명목으로 돌아다녔을지도. 시간이 흘러 이젠 제법 세상도 알고 내 모습도 사랑하지만 아직 ‘집’이라고 할만한 곳은 못 찾았다. 그래서 어쩔 거냐고? 이 답은 앞의 ‘어디서 살 거야?’에 대한 답과 같다. ‘솔직히 난들 알겠는가?’ 심지어 이젠 그런 질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허무한가? 하지만 거짓말할 수는 없다. 2022년 9월,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답이다.
얼마 전 미루의 학교 앞에서 하교하는 미루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이런 욕망이 밀려왔다.
- 네덜란드에서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돌아다니며 싶어!
10년 후면 환갑이다. 환갑은 뉴욕에서 맞고 싶다. 코니 아일랜드 해변에서 핫도그를 먹으며 먼저 간 친구 크리스를 위해 경배를 들고, 최고로 구하기 힘든 티켓의 뮤지컬을 보고,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 한복판에 벌러덩 누워 경찰이 여기서 뭐 하냐고 쫓아낼 때까지 천장의 별자리 장식을 보고, 저녁은 브루클린 단골집이었던 ‘테라스 베이글’에서 블루베리 크림치즈 베이글과 필리 치즈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먹을 거다. 테이크 아웃해서 바로 옆 프로스펙트 (Prospect)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하며 먹는 것도 좋겠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가 카밀과 미루가 합류하면 내 그림이 걸린 전시회를 보려고 첼시로 갈 거다. 갤러리 주인과 농담 따먹으며 사람들 반응도 보고 그림 앞에서 사진 찍어 SNS에도 올리고. 물론 10년 후에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지만… 여기까지 상상하는데 미루가 나왔다. 같이 집으로 오는데, 매매 표시 간판이 있는 집이 눈에 띄었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그 집 가격을 확인하니 구억 오천이다. 다락 포함 방 5개, 137 제곱미터 3층 집이 구억 오천인 게 비싼 건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서울의 집값보다는 확실히 좋은 딜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구억 오천은 언감생심의 가격이기에 그저 침 흘리며 집 사진만 볼 뿐. 그러다 아까 멈춘 상상이 생각난다. 내용을 추가할까 하다가 상상 대로만 된다면 이미 완벽한 환갑이기에 거기서 멈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환갑을 그리고 보니 네덜란드에서 오래 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확신이 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계속 돌아다니면서 살 거라고.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허무한 지 수차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짐 싸는 게 어렵지 않다. 미련을 두는 편이 아니어서 살던 장소나 가지고 있던 물건에 대해 빠른 분리가 가능하다. 유럽 산골에서 기본도 안 되는 원시생활도 해 본지라 핫 샤워와 세탁기만 있으면 사는 환경에 충분히 만족하고, 남이 가진 것에 대해 질투나 부러움도 별로 없는 희한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천성인지 뭔지, 아무튼 난 그렇다.
인간이 가진 모든 욕망의 함축인 집으로부터 과감히 자유로워지고 싶다. 지금까지 쓴 글들을 가만히 돌아보면 결국 난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 같다. 자유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그놈의 자유… 하여, 내가 머무는 모든 순간의 장소를 내 집으로 만들고 싶다. 어디에 살든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고 배포 있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