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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Dec 18. 2018

질문 일곱: 무슨 일 하시며 살아요?

가장 난처한 질문


40대 중반에 다시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진정 난 뭐 하는 사람일까?
이럴 때 바로 '이것'이 중심이 잡아준다.  


미루와 무대 위에 함께 섰던 공연 프로젝트, 마마카라바나. photo by Alex Afonso


# 1987년, 내가 할 일을 찾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영화 같은 장면이 있다. 주변의 모든 건 정상 속도로 돌아가지만, 자신과 피사체만 슬로우 비디오로 돌아가는, 한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 인생의 슬로우 비디오. 대상은 다양하다. 카페 문을 열고 온몸에 광채를 뿜으며 나타난 그녀일 수도 있고, 치는 순간 전율을 일으킨 기타일 수도 있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만드는 압도적인 자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쩔 땐 그 장면 하나로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1987년의 어느 날.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를 데리고 압구정 현대백화점 맨 위층에 있던 현대예술극장으로 가셨다. 어머니 친구분과의 모임이었고,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난 얼떨결에 그 무리에 끼어 연극 한 편을 관람했다. 연극의 제목은 ’19 그리고 80’. 19세 청년 헤롤드와 80세 할머니 모드의 범상치 않은 사랑 이야기로 강영걸 연출, 김혜자, 김주승이 주연이었다. 

잔잔하고 밋밋하게 살던 중1 소녀의 인생을 근 두 시간에 걸쳐 뒤흔든 연극이란 세계와의 조우를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주변은 깜깜했고 조용했으며 이 세상엔 오직 나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마술만이 존재했다. 극의 마지막, 극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드(김혜자 분)가 헤롤드(김주승 분)에게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가서 다른 이를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난 내가 세상과 작별하듯 눈물을 흘렸다. 팸플릿엔 대본이 담겨있었다. 난 내 방을 극장 삼아 그 대본을 통째로 외우며 하루는 모드가 되고, 하루는 헤롤드가 되어 혼자 사랑하고 혼자 죽었다. 그렇게 연극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내 인생 속으로 훅 들어왔고 그때부터 난 의심의 여지없이 내 본질은 연극인이라고 규정했다.


리스본에서. 미루가 찍은 내 모습


# 요즘 가장 난처한 질문


그 후 근 20년이 지났다. 예전만큼의 열정은 아닐지라도 난 아직도 스스로를 연극인이라 부른다. 비록 현장을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렇다. 난 경단녀다!) 내 마음의 밑바닥엔 항상 무대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명이 밝혀진 무대를 보면 여전히 심장이 뛰고 특히 내 궁극의 목표인 아동극을 보면 심장 박동 수는 배가 된다. 이 두근거림은 내 삶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된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난 요즘 이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난처하다. 그래, 과연 난 뭐 하는 사람일까?

현재 난, 

연극을 했지만 연극하는 사람도 아니요, 

마음 맞는 엄마들과 여행하며 즉흥극을 만들어 미루와 함께 무대에도 섰지만 아동극 전문가도 아니요,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을 업으로 삼은 사람도 아니요, 

여행을 했지만 여행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전문 여행가도 아니요, 

봉사 활동을 했지만 NGO 단체에서 일하는 사회활동가도 아니요, 

사진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진작가도 아니요, 

책을 출간했지만,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도 아니요, 

영어를 가르쳤지만, 전문 영어 강사도 아니다. 

그나마 확실한 건 미루를 키우는 엄마라는 것. 하지만 ‘누구의 엄마’로만 나를 정의하는 건 억울하다. 진정 난 뭐 하는 사람일까? 40대 중반에 다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니, 지금까지 무엇을 쌓은 걸까? 이거 인생 헛 산 거 아닐까?


이렇게 혼란스러워 살짝 우울해질 때 연극은 내게 지나왔던 행적을 살피고 미래를 생각할 힘을 준다. 

자, 승연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리스트를 적어보자. 이름하여 ‘내 인생 궁극의 리스트’. 


1. 내가 한 모든 경험을 기록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책상에 머리를 박아가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달필이 아닌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지구를 떠나고 싶다.)

2. 아이와 함께 한 여행을 주제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이건 몇 년 전부터 천천히 시놉시스를 쓰고 있는데 어떤 스타일로 그림을 그릴지 정하지 못하고 있다.

3. 그 그림책을 바탕으로 아동극을 만들고 싶다. 아동극은 내 궁극의 꿈이다. 이건 그림책을 만든 다음에 할 일이므로 멀리 보고 계획해야 한다. 

4. 아동극을 만드는 예술가들을 위한 아티스트 레지던스를 만들고 싶다. 이는 예술적 공동체를 꿈꾸는 카밀과 나의 이상과 맞닿기도 한다. 내 최종 목적지다. 

5. 미루를 잘 키우고 싶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와, 생각보다 꽤 많다! 이 항목들을 모두 이루어 내는 것만으로도 내 평생이 모자랄 것 같다. 그사이 미루는 성인이 될 것이고, 카밀과 난 건강을 유지하며 오가는 인생의 변수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새로운 걱정은 내가 살고 싶은 곳과 내가 하고 싶은 걸 펼칠 수 있는 곳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즉 살고 싶은 곳은 자연이지만 하고 싶은 연극 및 예술 활동 네트워크를 펼칠 수 있는 곳은 도시라는 딜레마. 자연과 도시를 오가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 난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간극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를 만난다는 건 천운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난 행운아다. 나에게 온 ‘연극’ 같은 그 무언가가 모두에게 오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1987년의 그 날을, 뭣도 모르는 중학생을 끌고 가신 어머니의 손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께 인생의 슬로우 비디오가 빨리 찾아오길 진심으로 빈다. 아직 오지 않았다면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가만히 기다리면 오지 않는다.


마마카라바나 프로젝트!


Photos by Yellow Duck & Alex Afon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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