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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Oct 20.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15. 무토는 어둠 속에서 지대 천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빗소리가 마치 기관총을 때려 박는 소리처럼 무섭게 들려왔다. 

    창가에 선 무토가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판잣집을 바라봤다. 판잣집 주위에는 경계병들이 양 떼를 지키는 감시견처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도라지 꽃'을 맞이한 첫날이 끝났다.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소용돌이쳤던 여성들의 비명과 울음소리, 병사들의 고성은 밤이 되자 전부 빗소리에 묻혔다. 무토는 주황색 불빛이 새 나오는 지대 천막을 바라봤다. 그 여자는 판잣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 치료를 받고 있을까?  


    나잖아! 정혜! 윤정혜! 

    너 홍병기잖아! 네 아버지는 홍원구 시고, 엄마는 길분네라 불리잖아! 뭐라고 좀 해보라고!


    여자의 절규가 되살아나자 무토는 다시금 머리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생각을 멈춰야 했다. 시원하게 쏟아내는 빗줄기라도 맞으면 처진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것 같았다. 꽁초를 창밖으로 던진 무토가 방문을 향해 돌아섰다. 


    딱히 산책이랄 것도 없었다. 무토가 경계병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도착한 곳은 지대 천막 주위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물론 불쑥 들어가 두통약이라도 달라하면서 여자가 돌아갔는지 여부만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복도에서의 소란 때문에 무토는 티끌만 한 의심조차 사고 싶지 않았다. 행여 지대장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티끌만 한 의심이 바로 기무라 대좌로 뻗어갈 수도 있었다. 무토에게는 여자와 무토를 번갈아 지켜보던 기무라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기에. 

    소리 없이 한 발씩 천막에 다다른 무토가 천과 천이 이어진 틈 사이로 지대 내부를 들여다봤다. 침침한 전구빛 아래 여자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백지장 같았다. 물에 젖은 천조각처럼 늘어진 모습이 아마도 진통제를 먹고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철제 틀에 묶인 여자의 가느다란 두 손목이 무토의 눈에 박혔다. 이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신조 일병이 걸어와 무토의 시야를 가렸다. 아마도 신조는 날카로운 의료 도구들 때문에 여자를 묶어 두었을 것이다. 

    신조는 허리를 조금 숙이더니 잠든 여자의 숨소리와 안색을 살피는 듯했다. 이어  식판을 챙겨 들고 지대 천막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무토는 신조가 취사장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경계병 쪽을 보며 고심에 빠진 얼굴로 변했다가 다시 지대 안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건 확실했다. 그제야 무토의 두 발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리마센... (모릅니다)


    늘어진 여자 얼굴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말... 

    무토는 여자를 내려다보자마자 그 말부터 불쑥 떠오른 이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혼란스러운 기분뿐이었다. 여자의 잠긴 눈을 보자 갑자기 네 개의 눈이 겹쳐졌다. 부모를 죽인 무토가 총구를 돌렸을 때의 두 아이의 눈들이. 아빠, 엄마가 왜 총알을 맞아 털썩 꼬꾸라져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으로 무토를 빤히 보던 눈. 그 젖어가던 그 눈동자가. 

    이때 스삭거리는 모포 움직임과 함께 여자 입에서 신음이 얕게 흘러나왔다. 무토는 바로 돌아섰다. 여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가는 어떤 오해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무토의 두 발은 서둘러 천막 출구로 향했다. 

    "병기야... "

세 발짝만에 무토가 멈췄다. 두 발짝만 더 가면 지대 밖이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무토의 등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괜찮아..." 

    죽어가는 듯한 맥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아. 낮에는 상관이 둘이나 있어서 아무 말도 못 한 거... 그중에 제일 나이 든 장교가 대장이지? 병기는... 조선인이라 차별도 받을 거고 계급도 낮을 거니까... 대장 앞에서 겁이 많이도 났을 거야...."

    무토는 돌아서지 않았다. 두 눈은 벌려진 입 안처럼 검은 천막 출입구에 꽂혀 있었다. 

    "나를 아나?" 

    일본말 한마디가 툭 떨어졌다. 차갑게만 느껴진 그 한마디에 정혜는 입을 닫았다. 무토에게 향했던 눈동자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다시 천장을 향했다. 

    "나는 무토다. 병기가 아니라..."

    "그래... 나도 알아. 너도 어쩔 수 없다는 거... 누가 듣기라도 하면... " 

    정혜가 천장 한 곳만 응시한 채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살았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어서 온 건데... 그러니까 괜찮다고... 병기는 꼭 살아... 그래야 돼..."

    정혜는 아예 눈을 감았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어떤 기분에 무토가 홱 돌아섰다. 

    "부적을... 당신이 준 건가?" 

    정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저 물음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부적 같은 건 없었다. 사진도. 깨어나고 보니까 아무것도... 없었다."

    정혜가 눈을 떴다. 불길하고도 강한 예감이 종을 치는 것처럼 정혜의 머릿속에 울렸다. 무토를 향해 정혜가 고개를 돌렸다. 

    "너... 정말... 기억이 없어?" 

    "내가... 조선인인가...?" 

    처음 터져 나온 무토의 조선말은 곧바로 정혜의 가슴에 박혔다. 정혜의 두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여자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사고당했어? 다쳤어?"


    다쳤던가...? 


    무토는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자 몇 초도 안돼 또다시 머리가 묵직해졌다. 여자의 상체가 요동쳤다. 묶인 두 손목을 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을 당했던 건데!!" 

    이 순간 갑자기 무토가 움직였다. 성큼 침상에 가까이 붙더니 손으로 정혜의 입을 막았다. 이어 작게 '쉿' 소리를 냈다. 정혜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무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토도 붉게 차오른 여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여자의 벌어진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무토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자신의 손에 닿았을 때의 그 뜨거운 감촉을. 여자는 진심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조가 식판을 들고 천막 출입구로 들어왔다. 무토가 등을 돌린 채 약장 앞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무토 군조님. 아니 조장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두통약이 있나?" 

    "아, 예... 심하십니까?" 

    "아니. 약간 묵직한 정도..." 

    신조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더니 무토의 안색을 살피는 눈길이 이어졌다. 

    "그냥 숙취다. 어제 코코넛 주를 과하게 마셨다." 

    신조가 약장에서 'US ARMY'라고 적힌 철제 통을 꺼내와 뚜껑을 열었다. 

    "미군 아스피린이 남았습니다. 두 알을 드십시오."  

    무토가 알약을 씹어 삼키다가 신조가 탁자에 내려놓은 식판이 눈에 들어왔다. 신조의 표정에 당혹감이 솟았다가 이내 무심한 척 잠든 정혜를 쳐다봤다. 정혜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저 이를 먹이려고 가져왔습니다. 종일 잠만 자느라 아무것도 먹질 않아서 말입니다." 

    "네 걸 가져온 거냐?"

    무토의 굳은 눈길에 신조는 추궁을 당하는 사람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보급이 자꾸 지체되니 말입니다... 환자를 먹일 게 마땅치 않고... "

    "괜찮다. 여자는 판잣집으로 돌아가나?"

    "아닙니다. 후송을 보낸다 하셨습니다. 기무라 대대장님 지시입니다."

    무토는 내심 놀랐지만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 정도로 심한가?"

    "지대장님은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다 하셨는데... 확실한 병명은 몰라서 말입니다. 검사는 필요한 모양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린 무토가 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내 저녁거리도 남았다. 조리병에게 말하면 줄 거다."

    "아닙니다."

    "후송 갈 때까지 네가 당직인 모양인데, 먹어라."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신조가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수고해라." 

    무토가 신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출입구를 향했다. 침상을 지나면서 여자를 아주 잠깐 쳐다봤다. 눈을 감은 여자의 얼굴은 눈가에서 콧등까지 번진 눈물자국으로 번들거렸다. 때마침  정혜가 눈을 떴고, 둘은 시선이 마주쳤다.  

    "저, 조장님. 혹시 두통이 심하시면 지대장님께 보고를 해서 이참에 야전병원에 같이 가보시는 게..."

무토가 신조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시선은 여자의 눈을 보던 그대로였다.  

    "신경 쓸 거 없다." 

    "알겠습니다.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무토의 대답에 여자가 무슨 의미 인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신조의 경례 소리가 들려왔고, 무토는 재빨리 천막을 빠져나왔다. 

    무토가 사라지자 정혜는 다시 눈을 꾸욱 감았다. 입술도 꽉 깨물었다. 격한 울음소리가 몸속 깊은 곳에서 휘몰아치는 걸 억지로 막고 있던 참이었다. 정혜는 두려웠고 무서웠다. 행여 입술이 떨어지면 저 깊은 울음이 죄다 쏟아져 나올까 봐. 그래서 자기 때문에 병기가 죽게 될까 봐. 다시는 병기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다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퍼질까 봐. 

    하지만 정혜는 자신이 죽는 건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병기가 아니면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밖으로 나온 무토가 걸음을 멈추고 지대 천막을 돌아보았다. 무토가 보기에도 여자에게 심각한 통증이나 호흡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일단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자, 무토는 여자가 후송을 간다는 사실에 딱히 의심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여자가 후송이 아니라 멀리 떠나도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전쟁터가 아니라면 그 어떤 곳이라도. 


    마츠이가 위병소 이층 난간에서 망원경을 내렸다. 담배를 물고 지포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가 멈췄다. 눈은 연병장 너머 지대 천막에 꽂혀 있었다. 무토가 아직 거기 서 있었다. 무토의 능력이라면 라이터 불빛에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가능성은 충분했다. 마츠이는 다시 망원경으로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얼마 후 무토가 움직였다. 마츠이는 무토가 장교숙소 1층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망원경을 내리고 지포 라이터를 켰다. 담배 첫 모금에 긴 연기를 내뿜고는 지포 라이터를 상의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눈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확신에 찬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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