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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Oct 22.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16. 나는 누구고...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기무라는 이 밤이 불길했다. 

    고작 '도라지 꽃' 여자 한 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무라는 입장에서는 여자 하나 없애는 일에 대대 전병력의 목숨을 건 진격작전보다 더 긴장이 된다는 게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 민간인 여자 하나 죽는 건 벌레가 발에 밟혀 죽는 것만큼이나 시시한 것이었다. 폭격기에서 떨어트린 폭탄 한 발에 민간인 수십 명이 죽어나가는 게 전선이 아닌가. 게다가 포탄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최전선이라면 부대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대상은 즉각 제거 대상일 뿐 동정의 대상은 절대 아니었다.

   

    무토의 정혼녀. 


    우연도 그런 기막힌 우연이 없었다. 고향땅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무토의 정혼녀가 어째서 '도라지 꽃'을 자원했단 말인가. 기무라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길하기만 한 초조감이 쉬이 없어지지 않자 기무라는 짜증마저 치솟았다. 하필 그런 년 하나 때문에 이 무슨... 

    기무라가 종일 내내 무토의 움직임에 예의 주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무토는 가장 어린 위안부를 내보낸 뒤에 하루 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무토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기억을 되살리려고 머리를 쥐어짜기라도 했을까? 기무라는 긴장과 초조감, 짜증을 오가다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부대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지휘관은 마땅히 '해결' 해야 하는 존재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불길함을 안겨준 실체, 그 여자만 사라지면 끝난다. 무토가 알아채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복도에 들어선 무토가 조용히 기무라 방을 지나 자신의 방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식사라도 했나?" 

    "네. 그렇습니다." 

    무토는 꼿꼿이 상체를 세우고 대답했다. 

    "사케가 한 병 남았는데 어때? 할 텐가?"

    "그게... 다음에 불러주시면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편한 대로 해."

    기무라가 아쉬운 표정으로 방문을 닫으려다 멈췄다. 

    "무토." 

    "네. 대대장님."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기무라가 고개를 끄덕하고 방문을 닫았다. 무토는 기무라의 닫힌 방문을 보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섰다. 구석 철제 의자에 앉아 어둠을 응시했다. 방금 기무라는 늦은 저녁을 먹었냐 물었다. 이 말은 무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뜬금없는 물음이 따라왔다. 괜찮나? 

    기무라는 무토의 무엇이 괜찮냐고 물었던 것일까? 

    어둠 속에 여자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정혜라는 여자와 기무라. 그리고... 어린 소녀의 목소리.  조선 아저씨 고맙습니다. 

  

    조선인. 


    그 단어를 되뇌는 순간 무토는 세상과 갑자기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이고 자신이 가진 거라곤 철제의자뿐인 외떨어진 존재.


    너... 정말... 기억이 없어? 


    검은 흙벽에서 밤벌레가 끼륵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둥둥 떠다니던 여자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여자는 웃었다. 


    정혜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까슬한 안남미를 찐 밥에 멀건 국, 짠지가 다인 식판에는 음식이 반 정도가 남겨져 있었다. 정혜는 거의 종일을 굶었지만 입맛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외려 식판을 받친 양 손이 자유로워진 게 더 기쁘기만 했다. 

    지켜보고 있던 신조가 다가와 알약 두 개와 물 잔을 내밀었다. 

    "진통제와 안정제입니다." 

    정혜는 물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병기와 함께 후송을 갈 수 있을지. 

    "삼키세요." 

    신조가 재촉하자 정혜가 알약을 집어 들고 잠깐 망설였다. 더는 약 기운에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 또렷한 의식으로 병기를 계속 생각하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때의 공포스러운 대가도 같이 치솟았다. 후송이고 뭐고 이들은 다시 판잣집으로 되돌려 보낼지도 몰랐다. 정혜는 죽었으면 죽었지 판잣집에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혜가 물 잔을 받고는 알약을 삼켰다. 

    "고맙습니다." 

    정혜의 일본말 인사에 신조는 어색했는지 아무 말 없이 풀어진 군용 밧줄을 집어 들었다. 정혜가 말없이 눕고는 양 팔을 철제 틀 위에 올려놓았다. 신조가 매듭을 묶었지만 이전처럼 꽉 조이지는 않았다. 정혜가 생각하기에 신조라는 군인은 왠지 좋은 사람 같았다. 병기를 대하는 태도도 그랬고... 정혜의 생각은 곧바로 병기에게로 이어졌다. 그래, 병기는 기억을 잃은 거야. 훈련 때이거나 전쟁 와서 충격을 받은 거야. 신조라는 사람도 두통이 심하면 후송을 가야 한다 했으니까... 두통이 기억을 잃었다는 신호인 거고... 아니 증상 같은... 정혜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들고 싶지 않은데... 근데... 병기는 왜... 후송을... 가지 않겠다... 했을... 까... 여전히... 착해... 빠져서... 


    기무라 대좌가 야간 순시를 위해 지대 천막에 들어섰다. 벌떡 일어난 신조가 경례를 하며 관등성명을 대려고 하자 기무라가 먼저 잘라 말했다. 

    "조용. 보고 안 해도 돼."

    신조가 바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정혜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기무라의 눈길이 한동안 정혜에게 머물렀다. 그때 입구에서 '대대장님'을 부르는 마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무라는 지대를 빠져나와 마츠이와 함께 연병장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마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토가 지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20분간입니다." 

    "아무도 없었나?"

    "위생병은 취사 천막에서 식사 중이었습니다."

    마츠이는 신조가 배식을 받자마자 바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보고하지 않았다. 

    "여자는 깨어 있었나?" 

    "제가 확인했을 때는 수면 중이었습니다. 위생병 말로도 약기운에 종일 처자기만 했답니다." 

    "무토가 들어갔을 때는 모른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기무라의 내면에 의심의 줄기가 뻗어가기 시작했다. 만약 여자가 깨어 있었다면? 어쩌면 무토가 궁금증을 못 참고 여자를 깨웠을 수도 있었다. 무토 혼자서 20분간 여자와 독대했는데 말없이 쳐다만 봤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정했나?" 

    "지휘소 상황실과 지대장한테는 새벽 01시 후송 출발. 미찌나 야전병원 오전 08시 도착 예정이라 알려 두었습니다." 

    "처리 장소는?"

    "카마잉 마을입니다." 

    주둔지에서 한 시간 거리의 마을이었다. 기무라가 살짝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가까운 거리 아닌가?"

    기무라의 염려를 미리 예상했다는 듯 마츠이가 즉각 대답했다. 

    "사람이 가장 깊이 잠드는 시간대가 02시에서 03시 사이입니다. 그 시각에는 동물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없을 때 신속히 처리해야 탈이 없을 겁니다." 

    기무라는 이번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기왕 하려면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맞다. 카마잉 마을 인근은 오지 중에 오지여서 사체 흔적을 없애기도 최적이었다. 

    "처리 후에는?"  

    "미찌나까지의 소요 시간을 감안해서 저는 마을에 남을 예정입니다. 밤 10시에 복귀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더 늦어도 돼. 영내에 보는 눈이 적을수록 좋아. 특히 무토가 실오라기만큼도 의심이 없게끔..." 

    마츠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절 믿으십시오. 대대장님." 


    새벽 00시 45분.

    마츠이 소대 소속의 유토 병장과 야마구치 일병이 아리사카 소총을 든 단독군장 차림으로 지대 천막에 들어섰다. 신조는 책상에서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야마구치 일병이 여자에게 다가가 소총 총구로 툭툭 건드렸다. 여자는 깊은 잠에 빠져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유토 병장이 신조 머리통을 툭 건드려 깨웠다. 신조가 벌떡 일어서더니 두 병사의 차림과 시간을 번갈아 보고는 물었다. 

    "후송입니까?"

    "여자는 약을 먹였나?"

    "지대장님 지시대로 수면제 두 알을 먹였습니다. 아마 미찌나 도착까지 계속 잘 겁니다." 

    "옮겨" 

    야마구치 일병과 신조가 각각 여자의 어깻죽지와 다리를 잡고 지대 밖으로 나왔다. 유토 병장이 구급차의 뒷문을 열자 바닥에 이송용 들 것이 깔린 게 보였다. 두 병사가 정혜를 들 것에 눕히자 유토 병장이 다시 여자의 양팔을 나무틀에 묶었다. 이송 준비가 끝나자 신조가 구급차 뒷문을 닫았다. 이때 동승석에 타고 있던 마츠이가 신조를 불렀다.  

    "아편을 가져와."

    "그게 몇 개 남지 않아서 말입니다. 지대장님의 허가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마츠이가 손가락을 까닥하면서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신조가 차창 쪽으로 한발 가까이 서자 마츠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신조가 휘청 했다가 바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코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허가는 네가 받아. 가져와."

    신조가 대답과 동시에 부리나케 지대 안으로 뛰어갔다. 마츠이가 담뱃불을 붙이며 여유로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토는 숙소 건물의 지붕에 걸터앉아 있었다. 지대 방향에서는 형체를 알아차릴 수 없는 지붕 측면의 어둠 속이었다. 이미 두 시간 전, 무토는 휑하게 뚫린 창을 빠져나와 외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왔었다. 오늘 밤은 잠을 자지 않기로 결심한 직후였다. 이유는 신조의 말 한마디가 문득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다 하셨는데... 확실한 병명은 몰라서 말입니다. 검사는 필요한 모양입니다.


    여기는 최전선이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병사가 후송을 간 적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병자가 민간인이면 바로 쏴 죽이는 게 일본군의 습성이었다. 행여 이송한다 해도 야밤에 행한다는 점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차량의 헤드라이트 빛은 수시로 출몰하는 적 정찰기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무토의 두 눈은 털털거리는 지대 구급차에 꽂혀 있었다. 방금 전 동승석에서 누군가 담배 불을 켰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신조가 급히 무언가를 가지고 와서 동승석에 건네는 모습이 보였고, 그제야 차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토가 눈으로 지대 차량을 좇았다. 차량은 위병소 가로대 앞에 멈췄다. 동승석의 장교가 출입 확인 절차를 위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뒷모습이 지대장은 아닌 듯했다. 위병이 확인을 위해  손전등을 켜고 다가왔다. 그때 무토의 눈에 뒷머리부터 목까지 새겨 넣은 문신이 박혔다. 

    욱일기였다. 

    무토가 일어섰다. 순간, 예전의 그 의문이 다시 뇌리를 때렸다. 


    나는 누구고...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기무라가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황급히 눈을 떴다. 마츠이가 출발하는 시각까지 기다린다는 게 회전의자에서 설핏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른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01시 32분을 지나고 있었다. 기무라가 주변 공기를 살피듯 잠시나마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위가 조용했고 병영은 정적에 파묻혀 있었다. 하지만 기무라의 신경의 끝에는 여전히 불길함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기무라가 무토의 방문 앞에 섰다. 안의 미세한 기척이라도 감지해보려는 듯 한동안은 움직이지 않다가 조용히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기무라는 갑자기 이 순간이 인생의 전부를 건 도박판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패를 쥐고 상대의 패를 확인하기 직전의 그 심정 같은. 

    기무라가 방문을 열었다. 끼익 낡은 경첩의 울음소리가 귀속을 후벼 파는 듯했다. 좁은 방임에도 기무라의 눈길은 한참이나 구석구석을 살폈다. 방 안은 온통 어둠뿐, 무토는 없었다. 

    기무라는 군홧발 소리를 쿵쾅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선 전화기로 위병초소에 연결했다. 

당직사병이 우렁차게 관등성명을 댔다. 기무라가 초조함을 감춘 음성으로 물었다. 

    "무토 조장이 영외로 나갔나?" 

    "그렇습니다. 8시 방향 밀림 쪽에서 수상한 소리를 들어서 확인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병신 새끼! 보고를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무토 조장은 단독 작전 수행자이니 말입니다. 수색 허가가 떨어졌다고 하길래..." 

    겁에 질린 당직사병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이동 수단이 뭐야? 걸어갔나?"

    "아닙니다. 리쿠오를 타고 갔습니다."

    97식 리쿠오 모터사이클은 일본군의 주력 사이드카(오토바이 옆으로 별도 좌석을 붙여 만든 2인용 바이크 종류)로 동승 좌석에 11식 경기관총을 거치한 게 특징이었다.

    "무기는?"

    "개인 화기는 없었습니다. 아, 잠시 대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당직병들의 오가는 말소리에 기무라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대대장님. 리쿠오 동승석에 경기관총 탄약통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기무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토가 나간 게 언제야?" 

    출입 기록을 살피는 종이 소리가 들렸다. 

    "01시 20분입니다." 

    "지대 차량 통과 시각은?" 

    "01시 03분입니다." 

    기무라는 바로 통신 연결 단자를 뽑고는 상황실 단자 구멍에 꽂았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당직 병사가 받았다. 

    "당직 장교 바꿔!" 

    몇 초 후 작전 장교가 전화기를 건네받자 기무라는 즉각 비상 출동 명령을 내렸다. 

    "5분 내 수색 1개 소대 출동. 장소는 카마잉 마을. 무토와 마츠이를 찾아 하달할 것. 하달 명령은 마츠이 중위는 작전 중지. 무토는..."

    기무라는 말을 끊고 잠시 숨을 골랐다. 

    "무토를 발견하는 즉시 전달해라.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고. 기무라가 기다린다고."

    기무라가 전화를 끊자마자 병영 내에 수색대 출동을 알리는 비상벨이 거세게 울려 퍼졌다. 

    수화기를 꽉 쥔 기무라의 손이 떨렸다. 이 순간 기무라는 깨달았다.  

    불길함의 실체는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더럽게 불길하고 죽음만큼 살벌한.

    무토와 자신 사이의 어떤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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