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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Jun 19.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13.시리마센(知りません)

    여자는 당번병의 손에 이끌려 막 방문을 나선 참이었다. 

    무토의 얼굴을 빤히 보던 여자의 두 눈이 점점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여자의 눈 흰자위가 바알간 물감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무토가 여자를 바라봤다. 분명 처음 본 얼굴이었지만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도 섞여 들었다. 꿈속의 여자 얼굴이 겹쳐졌다. 하지만 그 여자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지치고 피로감에 절은 혈색과 살이 빠진 듯 여읜 모습은 확실히 달라 보였고, 벌겋게 부어오른 빰 한쪽으로 인해 꿈속의 여자와 비교하기가 정확하게는 불가능해 보였다.   

    "병기야!" 

    여자가 온몸에 힘을 주며 크게 외쳤다. 복도가 쩌렁 울릴 정도였다. 여자가 무토를 향해 달려오려고 했지만 당번병이 드세게 팔뚝을 잡아끌며 제지했다. 여자의 몸이 휘청거렸다. 

    "병기야 나야! 나라고!" 

    여자는 당번병의 팔을 뿌리치고자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무토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다. 벌컥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어 기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동시에 그다음 방문도 열리며 마츠이마저 복도로 나왔다. 맨발에 청주병을 든 마츠이는 웃통을 벗은 채였고, 바지 벨트가 풀어져 있었다. 정혜는 기무라와 마츠이도 보란 듯이 더 크게, 더 세게 소리쳤다. 

    "나잖아! 정혜! 윤정혜!"

    무토의 시선이 기무라를 향했다가 다시 마츠이를 향했다. 둘 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만 무토를 관찰하듯한 무표정한 시선뿐이었다. 상관 둘의 시선을 느낀 무토의 얼굴에 당혹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내 사진이 있잖아! 부적 주머니! 너 가지고 있잖아! 사진!"

    정혜의 이 한마디에 기무라의 표정이 흙빛으로 굳어지는 걸 무토는 바로 알아챘다. 무토가 알아들은 조선말 '사진'은 일본말로 '사신(写真 しゃしん)'이라 발음된다. 정혜도 멈칫하는 기무라의 표정을 읽었다. 정혜에게 지금 이 순간이 온몸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부딪혀 왔다. 지금이 지나면 끝이다...  

    "사진 말이야 사진! 내 사진!" 


    사신, 사신, 사신... 

    

    기무라는  그제야 여자가 누군지 깨달았다. 무토의 부적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사진 속 그 얼굴이었던 것이다. 무토의 정혼녀. 

    기무라가 무토와 정혜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무토에게 꽂히더니 무토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마츠이도 마찬가지였다. 눈빛에 무언가 긴장이 서리며 무토의 다음 동작을 기다리는 듯했다. 

    "약혼했잖아! 둘이서 비밀 정혼식도 올렸잖아! 병기야! 병기야, 제발... 무슨 말 좀 해봐!"

    정혜의 목소리가 절박한 애원조로 바뀌었다. 

    "너 홍병기잖아! 네 아버지는 홍원구 시고, 엄마는 길분네라 불리잖아! 뭐라고 좀 해보라고!

    "저 여자를 아나?" 

    기무라가 대뜸 물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무토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흐릿한 느낌뿐이었다. 꿈속의 여자와 어딘가 닮아 보인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 보는 여자라는 건 분명했다. 복도에 떠 있는 모든 눈이 무토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무토가 입술을 열려는데 갑자기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숙취 때의 두통보다 그 강도가 서너 배는 세진 통증이었다. 시선마저 흔들렸다. 2미터 앞에 선 여자가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고 여섯이 되었다. 

    "다시 묻는다. 저 여자를 아나?"

    기무라의 근엄한 목소리와 미간을 찌푸린 마츠이의 시선 , 간절한 정혜의 눈빛까지 무토에게 얽혀 들었다. 극심한 두통으로 무토는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무토가 눈을 감았다. 정혜는 애끓는 심정으로 무토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이 순간 그녀에게는 오직 한마디만이 필요했다. 그 말은... 이 순간 무토의 또박또박한 일본어가 정혜의 귀에 꽂혔다.  


    시. 리. 마 .센 . (知りません. 모릅니다.)


    무미건조한 군인의 말투... 무토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기무라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시  묻는다. 저 여자를 모른다고... 천황께 행세할 수 있나?"

    무토가 바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맹세합니다. 절대 모릅니다." 

    그러면서 무토는 90도로 허리까지 숙였다. 

    정혜는 분노와 치욕으로 두 눈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눈 앞의 남자는 분명히 병기였다. 세상 어느 여자가 한동네에서 이십 년을 넘게 봐왔던 약혼자를 몰라본단 말인가. 까맣게 변한 얼굴색에 눈매가 달라지고 얼굴살이 빠지기는 했어도 다른 남자일 리는 절대 없었다. 

    "너 왜 그래? 전쟁통에 머리가 돌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쪽발이 새끼로 살기로 작정이라도 했어? 왜놈 쓰레기가 된 거냐고!" 

    억장이 무너진 정혜가 마구 퍼부었다. 달리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무토는 눈을 감았다. 귀 양쪽 머리를 후벼 파는 통증 때문인지 윙윙 대는 이명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느샌가 정혜 앞에 선 마츠이가 퍽! 주먹으로 정혜의 얼굴을 정통으로 휘둘렀다. 강한 주먹에 정혜의 고개가 돌아가며 입 안에서 피가 터졌다. 

    "개 같은 조선년이 거짓말을 해?" 

    마츠이의 발길질이 정혜의 복부를 걷어찼다. 허리가 푹 꺾인 정혜의 몸이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 다. 배가 찢긴 것 같은 극렬한 고통과 함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마츠이가 다시 발을 들었다. 정혜의 가슴을 찍어 누르려는 동작이었다. 

    "그만 하십시오!" 

    무토의 메마른 음성이 복도에 울렸다. 마츠이가 발을 멈추고 무토를 돌아봤다. 기무라의 눈빛이 다시 가늘어졌다. 

    "소대장님의 격투 실력 정도면 내장 파열이나 내출혈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더 맞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마츠이의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발을 내리고 무토를 향해 걸어왔다. 

    "명령해?" 

    마츠이가 무토의 멱살을 잡았다. 

    "너 따위가?"

    이번에는 쇠정으로 머리를 부수는 듯한 두통이 파고들면서 무토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이 표정이 마츠이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무시당했다고 여긴 마츠이가 위쪽 머리로 무토의 턱을 들이박았다. 무토가 살짝 피했지만 그래도 타격은 있었다. 무토가 마츠이를 밀어내며 뒤로 한 발짝 움직였다. 일그러진 무토의 표정은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이 새끼가... 해보자는 거야!" 

    기무라의 차가운 시선은 그대로 무토를 향해 있었다. 무토의 다음 행동을 인내심 있게 지켜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토의 흔들리는 눈이 쓰러진 여자에게 꽂혔다. 정혜의 눈이 감기는 중이었다. 

    "꿇어, 새끼야!"

    마츠이가 명령했다. 

    "여자는...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공격하지도 못합니다.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네 놈이 결정해? 바로 죽는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렇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건 모릅니다."

    "내가 누군지는 모르고?"

    무토는 여자만 계속 보고 있었다. 결국 정혜는 의식을 잃고 늘어졌다. 

    "그만해." 

    기무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번병! 의무실로 데려가라. 지대장이 직접 보라고 하고." 

    마츠이가 무토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청주병을 벌컥 들이키더니 무토에게 내밀었다. 

    "마셔. 그만 하라시잖나, 대대장님이..."

    무토는 술병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마츠이의 어깨너머로 여자를 다시 쳐다봤다. 당번병이 늘어진 여자 몸을 업으려다 계속 떨어트렸다. 벌써 세 번 째였다. 무토가 청주를 들이붓다시피 하고는 마츠이에게 되돌려 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무토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기무라와 마츠이의 시선이 무토를 따라갔다. 무토가 정혜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계단을 향해 멀어져 갔다. 

    기무라와 마츠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멍청한 새끼."

    쾅! 방문이 닫히며 기무라는 사라졌다. 마츠이가 복도 창으로 다가섰다. 막 장교 숙소를 나선 무토가 여자를 안고 지대로 향해 가는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멍청한 새끼? 내가 왜? 


    무토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아예 뛰다시피 지대를 향하고 있었다. 앞으로 열 발짝 정도면 지대 천막이었다. 마츠이는 눈으로 무토를 좇으며 작심을 굳혔다. 

    무토는 기억을 할 것이다. 

    그러면 누가 멍청한 건지는 뻔해진다. 자신이 입증을 해 보이면 기무라 대대장도 끝이고, 무토는 확실히 마츠이 발 밑으로 기어들어올 수밖에는 없으리라. 그럴 방법은 하나뿐... 

    무토가 지대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저 여자... 무토의 정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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