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샤쓰 그 신후 May 31.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12. 기무라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기무라의 눈길이 정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마치 처음 본 물건의 값을 매기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러다가 정혜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기무라가 대뜸 물었다. 

    "다른 위안소에서 본 적이 있나?" 

    기무라는 여자의 얼굴이 오늘 처음 본 인상 같지 않았다. 군인이 되기 전 나가사키에서 마주치거나 말을 나눴던 추억 속의 여자 같다는 아련한 느낌이 일었다. 

    정혜는 기무라의 가슴 부근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장교 복장이 달라 보였다. 왼쪽 가슴에 사각형의 군대 문양(약장이라 부름. 훈장, 표창 등을 간략히 표현해서 군복 왼쪽 가슴 부분에 박는 표식)이 네 줄이나 줄줄이 박혀 있었다. 어깨에 달린 견장의 별 문양도 왠지 지금껏 만난 여느 장교보다는 더 고급져 보였다. 꾸며진 방의 분위기도 그렇고 눈 앞의 남자는 아무래도 이 부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일 것 같았다. 정혜는 순간 갈등했다.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살려달라고,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 자신은 간호부로 여기 온 것이고, '병기'라는 조선인 군인을 찾기 위해 온 거라고 매달려 보고 싶었다. 그 순간 기무라의 손이 훅 다가왔다. 정혜의 턱을 잡더니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치 흠집난 과일을 골라내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무라는 고심하고 있었다. 이 얼굴에 그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끈덕진 예감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 예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만에 주물러 볼 여자 몸인가. 애써 기억을 떠올리기보다는 쾌감에 향한 욕구가 더 강하게 덮쳐왔다. 이 얼굴이 어째서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일을 치르고 나서 찬찬히 물어보면 될 터였다. 결국 욕구에 승복한 기무라가 여자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침대를 가리켰다. 


    그 손짓 하나로 정혜는 여태 불길하기만 하던 자신의 현실이 무엇을 향해 돌진해 왔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남은 건 어떻게 벗어나느냐였다. 그다음엔 어떻게 죽느냐도. 

    정혜는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 바로 옆에 멈춘 정혜가 눈을 감고 긴 호흡을 했다. 손 안의 벌레는 아무리 깨물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사방을 헤집는 속도가 빨라졌다. 결심을 굳힌 정혜가 저고리 치마의 갈라진 부분을 열고 속곳을 내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의 생식기 안으로 벌레를 집어넣었다. 

    등 뒤로 기무라가 느껴졌다.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혜의 몸이 굳어졌다. 기무라가 정혜의 어깨를 잡더니 가볍게 밀었다. 

    "다 벗고 올라가."

    망설이는 정혜의 눈이 무언가를 찾듯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때 책상 위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책갈피처럼 책 속에 반쯤 묻힌 손잡이는 단도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어젯밤 취사병이 주었던 똑같은 물건이 서너 개 놓여 있었다. 포장지에 '돌격'이라 적힌 그 물건이.  

    정혜가 기무라를 향해 돌아섰다. 정혜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가늘게 치솟은 눈매는 매섭고 도발적인 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정혜가 기무라의 팔 옷깃을 잡더니 가볍게 끌어당기며 책상 쪽으로 움직였다. 책상 앞에 멈춘 정혜가 다시 돌아서서 기무라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책상 위로 훌쩍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았다. 기무라의 눈에 호기심이 번져갔다. 정혜가 기무라의 시선을 느끼며  돌격 포장지를 찢었다. 예상대로였다. 미끄덩거리고 흐물거리는 둥근 고무는 그 짓을 위한 남자의 물건이란 건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정혜가 콘돔을 들어 기무라에게 보이고는 다시 포장지 위에 올려두었다. 정혜가 기무라를 빤히 쳐다봤다. 정혜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기무라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무토는 의자에 앉은 채 사병이 데리고 온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아니라 그냥 여자애 같았다. 기무라가 약속한 대로 도라지 꽃 중에서 가장 어린 소녀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무토는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고, 이 어린애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라는 건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소녀는 무토가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배 앞으로 맞잡은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듯했다. 

    "몇 살이야?"

    무토가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소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일본말을 모르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소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저씨... 집에 가게만 해주시면... 내  무슨 짓이든 다 할게요.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왔어요. 아저씨 제발요..."

    소녀는 조선말을 했고, 무토는 알아들었다. 과거 무토가 받은 훈련 과목에는 당연히 언어도 포함되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익혔고, 간단한 의사소통은 할 수준의 버마어까지 습득했다. 그러나 조선말은 배우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토는 그 당시 이미 조선말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교관이 그러한 이유로 누락시켰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일본에 살면서 언젠가 조선말을 배웠을 것이다. 다만 기억을 하지 못할 뿐.

    그렇게 스스로 답을 내렸지만 무토는 뭔가 찜찜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연스레 꿈속의 여자 얼굴이 떠오르며 눈 앞의 소녀 얼굴이 겹쳐 보였다. 도대체 누굴까? 왜 하필 이때에 그 얼굴이 떠오른 거지? 

    무토는 생각에 빠진 채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던 소녀의 표정은 점점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변해갔다. 생각에서 빠져나온 무토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소녀를 저대로 계속 놔둘 수는 없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은 쉴 수 있을 거다. 여기 와서 앉아."

    무토가 소녀가 알아듣게끔 조선말을 하며 일어섰다. 멈칫하던 소녀는 무토가 의자를 비워주자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

    "아침밥은 먹었나?"

    "아니요..."

    "먹을 게 있는지 보고 올 거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대신 아무 소리 내지 말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하자 무토가 돌아섰다. 

    "조선 아저씨, 고맙습니다."

    애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무토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질문이 머릿속에 하얗게 새겨졌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그 순간 멈춘 무토의 두 발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기무라의 고함소리와 어떤 여자의 악다구니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정혜는 기무라가 행위를 시작하려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기무라의 두 눈은 정혜의 벌어진 사타구니에 박혀 있었다. 잠시 후 기무라가 닿을 듯한 거리까지 가까이 서더니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기무라의 손이 자신의 팬티 끈을 잡았을 때 정혜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단도 손잡이를 힐끗 봤다.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정혜는  지금 이 상황에서 오직 저 단도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이라 여겼다. 그러고는 기무라가 팬티를 내리고 더 가까이 붙을 순간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때 사타구니에 스멀거리는 감촉이 느껴지면서 따끔거렸다. 벌레가 머리통을 내밀며 안쪽 허벅지를 향해 기어 나왔고, 그것을 본 기무라가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급히 바지를 추어올린 기무라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정혜를 노려봤다.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짝! 짝! 정혜의 뺨을 연거푸 때렸다. 정혜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상체가 비틀거렸다. 정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기무라가 한 대 더 치려고 손바닥을 들어 올린 그때에 정혜도 손을 뻗어 단도 손잡이를 잡았다. 기무라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칼을 쥔 정혜의 팔도 기무라를 향해 둥근 원을 그렸다. 기무라는 정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격투에 단련된 군인이었고 무기를 쥐었다 해도 허공을 가를 뿐인 여자의 손쯤은 거뜬히 제압할 능력이 있었다. 기무라의 손이 정혜의 손목을 딱 잡았다. 정혜의 두 눈이 벌어지면서 절망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기무라가 노기 어린 눈으로 정혜 얼굴을 쏘아봤다. 강하게 뺨을 맞은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그 얼굴에 또다시 익숙함이 밀려들었다. 

    "니년은 누구야?"

    기무라가 정혜의 팔목을 잡은 손에 악력을 더 세게 가했다. 어떻게든 단도를 놓치지 않으려는 정혜가 고통을 참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기무라는 확신했다.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다. 

    그때 정혜가 결국 힘에 굴복하며 단도를 떨어뜨렸다. 

    "죽여..."

    한 올의 미련마저 포기한 정혜의 목소리였다. 기무라는 여자의 손목을 계속 쥔 채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도대체 어떤 년이야!" 

    "죽여! 제발 죽여 달라고! 죽여! 미친 쪽발이 새끼야!" 

    기무라의 겁박에 정혜가 조선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고성을 내질렀다. 기무라가 정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침대로 끌고 가 처박았다. 그러고는 벽에 걸린 군도를 칼집에서 빼들고 정혜를 향했다. 차가운 칼날 끝이 정혜의 목에 닿았다. 이대로 푹 쑤셔 넣으면 정혜의 경동맥이 끊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피어오를 터였다. 정혜는 눈을 감았다. 결국은 이렇게 끝날 일이었다. 병기는 찾지도 못한 채. 

    "죽고 싶다고?"

    정혜는 두 눈을 꾹 감고만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미련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단도는 적군의 총에 죽을 순간이 닥쳤을 때만 쓸 수 있는 칼이다. 어머니가 천황폐하를 위해 자결하라고 준 거란 말이다. 더러운 니년 몸뚱이에 쓸 칼이 아니라고!"

    여자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욕은 이미 날아가버렸다. 기무라는 이 년을 어서 처리하고 담배나 한 대 물었으면 하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도라지 꽃도 천황폐하의 하사품이다. 개 돼지만도 못한 니년들의 천박한 몸뚱이는 마음대로 죽을 자격조차도 없다." 

    칼을 접은 기무라는 당번병을 소리쳐 불렀다. 

    


    무토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계속 서 있었다. 기무라의 고성과 여자의 악다구니 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당번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여자의 거센 저항이 끝을 본 모양이었다. 무토가 소녀 쪽을 돌아봤다. 얼음장 같았던 표정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소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무토는 소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해주기로 작정하며 문 손잡이를 당겼다. 


    "병기?"


    무토가 복도로 나와 방문을 닫는 순간 등 뒤에서 꽂힌 말이었다. 손잡이를 잡은 채였다. 천천히 무토가 돌아섰다. 


    거기 여자가 있었다. 자신을 빤히 보는 한 여자가. 


이전 12화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