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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May 23.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10. 도라지 꽃이다!

    기어이 그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미찌나 기차역 승강장에서였다.

전날 점심 무렵 양곤 기차역에서 출발한 보급 열차는 22시간이나 달려 미찌나 역에 도착했다. 좌석도 없는 화물칸에 처박혔던 여성들은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심하게 지쳐 있었다. 당장이라도 아무 바닥에나 누워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군속 안 씨는 목적지까지 더 이상은 철길이 놓여있지 않아서 타고 갈 수송트럭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혜와 24명의 여성들은 하차장에 내리자마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신선한 공기를 끌어 마셨다.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극심한 피로에 지친 얼굴에는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는 불안감이 그득했고, 허기와 갈증이 무거운 쇳덩이처럼 여성들의 몸뚱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몇십 분이 지나자 안 씨가 죽통과 사발 그릇을 사람 수대로 들고 나타났다. 중간 기착지에서 배급받았던 그 이름 모를 죽이었다. 콩가루와 다른 가루를 섞어 끊여낸 듯한 밍밍한 맛이었다. 살려면 그나마도 먹어야 했다. 안 씨가 국자로 멀건 죽을 떠서 사발에 담아주는 와중에 한 일본 헌병이 물통을 들고 왔다. 여성들은 물통을 보자 너도나도 달려들었고, 잠시 혼란이 벌어진 이때 기어이 그 사단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번에도 연자였다. 아무도 그녀가 물통 주변 너머로 슬슬 뒷걸음질 치는 걸 보지 못했다. 연자는 잠시 철길의 저 끝을 바라보았고 다시 여성들에 의해 가려진 헌병 쪽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 결심이 서린 순간, 그녀는 이내 몸을 틀어 철길로 뛰어내렸다. 몇 초 뒤, 삑! 하는 호각소리가 들렸고 일본 헌병들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뒤따라 터져 나왔다. 연자는 죽을힘을 다해 철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물통을 들고 왔던 그 헌병이 제일 먼저 달려갔고, 곧바로 권총집에서 남부 권총을 빼들어 지체 없이 여러 발을 쏘았다. 연자의 등이 터지며 피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 장면을 본 정혜는 입을 틀어막았고, 다른 여성들은 비명을 질렀다. 총을 쏜 헌병은 이미 주검이 된 연자 몸뚱이를 군홧발로 뒤집었다. 일본말로 욕을 퍼붓더니 보란 듯이 이마에 한 발을 더 먹이고 돌아섰다. 겁에 질린 여성들 사이로 걸어온 일본 헌병이 죽통과 물통을 발로 차 쏟아버렸다. 

    "잘 봐 둬라. 탈출을 하려는 년은 저 꼴을 당할 거다."

헌병의 고함 소리에 여성들은 더한 공포에 질려 들었다. 정혜는 군속 안 씨와 눈이 마주쳤다. 안 씨가 끄덕끄덕 작은 고갯짓을 해 보였다. 마치 저 말이 사실이란 듯이. 정혜의 떨리는 눈이 다시 연자를 향했다. 열대의 파리떼가 무섭게 내려앉으며 연자의 몸은 점점 거멓게 사라지고 있었다. 정혜는 그 광경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 같았다. 


    여성들을 태운 군용 트럭은 족히 너 댓 시간은 더 달렸다. 거리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한 길이라곤 없었다. 좁은 데다 온통 구덩이가 파인 진창길 때문에 트럭은 좀체 속도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폭우와 강한 햇빛을 막기 위해 천막으로 둘러친 수송 칸 내부는 열기로 숨이 턱턱 막혔고 땀줄기가 비 오듯 흘러내였다. 그러기를 몇 시간 째 참아가며 정혜의 눈은 멀어지는 트럭 뒤편 풍경에 줄곶 꽂혀 있었다. 똑같은 거대한 산자락이 계속 이어졌고 트럭은 누가 봐도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이런 곳에 공장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당연히 병원도 없어 보였다. 양곤이나 미찌나라는 큰 도시였다면 모를까...  불길한 눈빛은 다른 조선 여성들도 정혜와 마찬가지였다.  여성들 사이에 떠도는 건 무거운 침묵과 불안뿐이었다. 

트럭이 거친 굉음을 토해냈다. 이제 막 진입한 오르막 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길 양 쪽의 가파른 경사면에는 온통 나무 덤불뿐이었다. 정혜와 여성들이 행여나 떨어질까 싶어 조마조마하는 그때, 남자의 고함소리가 터졌다.

 

    "도라지 하나다!!!" 


    그리고 몇 초 뒤, 산중에는 와! 하는 함성이 메아리쳤다. 정혜의 눈에 곧바로 경계초소 감시탑이 들어왔다. 3층 정도의 높이의 원두막처럼 보였고, 흙주머니를 잔뜩 쌓인 게 누가 봐도 군부대였다. 트럭이 정문을 통과하자 함성을 내지르는 일본군인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트럭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눈에 비친 병사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대부분이 웃통을 벗었고 일부는 아예 팬티나 훈도시 차림이었다. 숨통을 조이는 공포가 수송 칸 가득 번져갔다. 정혜와 여성들 대다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거나 아예 얼굴을 가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혜의 눈에 누군가가 잡혔다. 몰려든 군인 무리 저 너머에서 막 일어서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정혜가 벌떡 일어났다. 찰나적으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듯한 강한 느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때 열 명이 넘는 군인들이 수송 칸 문짝을 붙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그 남자가 가려져 버렸다. 정혜가 트럭 위장막을 단단히 잡은 채 까치발을 들고 애타게 그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연병장에는 더 많은 병사들이 몰려들었고 똑같은 군복 속에서 그 남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정혜의 심장이 요동치며 가슴 안쪽이 타들어갔다.  


    병기였을까?


    이 순간 정혜에게는 현실의 모든 장면이 눈 앞에서 사라진 듯했다. 나무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남자의 모습 외에는. 


    시끄러운 호각 소리가 난무했다. 장교와 무장을 한 경계병들이 달려와 트럭에 매달린 병사들을 떼어내고 소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트럭은 한 대형 천막 앞에 멈췄다. 안 씨가 수송 칸 문짝을 열고 모두를 내리게 했다. 먼저 내린 정혜가 대형 천막을 쳐다봤다. 병원임을 알리는 빨간색 적십자 표시와 '支隊(지대. 파견 나온 의무대를 부르는 일본식 이름)'라는 한자가 눈에 띄었다. 안 씨가 수송 칸 문을 닫는데 정혜가 또 한 번 안 씨를 붙잡았다. 

    "여기가 병원이에요?" 

한순간 기대를 품은 정혜가 물었다. 안 씨가 지대 천막을 보더니 정혜의 시선을 피했다. 

    "긍께, 고거이... 맴을 단단히 먹어야 쓸 겨. 워칙히건 살아서 고향 땅 돌아가는 게 최우선이니께. 무조건 말여..." 

    안 씨가 팔을 뿌리치고 성큼 멀어졌다. 정혜가 다시 안 씨를 붙잡아 보려는데 불쑥 거친 손이 끼어들어 정혜의 팔뚝을 잡았다. 경계병이 정혜를 노려보더니 턱짓으로 대형 천막을 가리켰다. 때마침 천막에서는 신조 일병이 소총을 든 경계병 한 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경계병의 소총 개머리판에 떠밀려 들어온 여성들이 두 줄로 늘어섰다. 지대 천막 안에는 적십자 완장을 찬 위생병이 셋, 따라 들어온 경계병이 둘이었고, 중위 계급장을 단 지대장은 책상 앞으로 놓인 의자에 앉아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신조와 위생병들이 여성들 손바닥에 각각 세 개의 알약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신조가 어리둥절한 여성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했다. 

    "말라리아 예방약, 설사 예방약, 소금 정제입니다. 여기는 모기가 많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죽습니다. 나중에 바르는 모기 크림도 나눠줄 겁니다. 식수는 우물과 빗물을 받아서 정제해서 사용합니다. 소독을 한다고는 하지만 설사가 잦습니다. 미리 먹는 게 좋습니다. 소금 정제는 무더위에 땀을 많이 흘렸을 때 꼭 먹어야 합니다. 아마 이 곳으로 오는 시간 동안 땀을 많이 흘렸을 테니 지금 바로 다 씹어 삼키십시오." 

    신조의 말투는 상냥했지만 어리숙했다. 한 번에 많은 여자들 앞에 서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 건지 부끄러움을 타는 태도였다. 반면 신도의 수발을 돕는 다른 위생병 둘은 노골적인 시선과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가운뎃손가락을 펴더니 반대 손 엄지와 검지로 만든 원 안에 쑤셔 박는 행위를 보이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일본말을 알아들은 여성들이 먼저 알약을 삼키자 머뭇하던 여성들도 따라 씹어 삼켰다. 당시의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열성적인 황국신민 교육을 강요한 탓에 일본말은 어느 정도 알아듣는 여성들도 있었다. 정혜도 조금은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여성들이 전부 알약을 다 삼키자 지대장이 양 손에 투명한 장갑을 꼈다. 그러자 위생병이 작은 철제 통을 들고 와서는 작은 솜뭉치가 달린 작대기를 꺼내 건넸다. 여성들은 그게 면봉이란 걸 아무도 몰랐다. 

    "지대장님이십니다."

    신조가 소개하듯 장교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면봉을 손에 든 지대장이 입을 열었다. 

    "전부 아랫도리를 벗어라. 속옷까지 다 벗고 한 명씩 앞으로 나와." 

    그 순간 여성들은 그게 뭔 말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랫도리를 벗으라니....? 속곳까지 다? 일본어를 알아들은 여성들이 어리둥절하며 작게 웅성거리자 이번에도 신조가 나섰다. 

    "성병검사입니다. 부대원에게 옮기면 안 되니까요. 지대장님의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성병이란 단어를 알아들은 한 여성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울음은 곧 전파되었고, 의미를 알아들은 여성들은 오들오들 떨며 전부 얼음장으로 변한 듯했다. 남자들이 보는 앞에서 속옷을 벗고 여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이라니... 이런 상황에 세상의 그 어떤 여성이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지 않겠는가.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다!"

    경계병이 바로 옆에 있던 여성의 저고리를 거칠게 잡아챘다. 얇은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고 여성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 여성은 황급히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수치심에 벌벌 떨며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변했다. 경계병과 위생병은 씩 웃으며 여성의 가슴께를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정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여성을 보다가 한 순간 경악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천막천이 이어지는 작은 틈에 무수한 눈동자가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마치 괴물처럼.... 구경거리를 즐기는 듯한 병사들의 희번덕한 눈알들이었다. 정혜의 가슴에 불길이 타올랐다. 

    "저는 야전병원 간호부로 왔습니다."

    또박또박한 일본어. 정혜의 목소리였다. 

    "여기 있는 조선 여성들은 군수 공장이나 식당에서 일한다는 말을 듣고 온 것입니다. 여기에 병원이나 공장이 있습니까?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대장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정혜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정혜는 어떤 말이라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차갑고도 섬뜩한 느낌이 뒷목에 닿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뻔한 정혜는 그것이 소총 총구임을 바로 깨달았다. 갑자기 머릿속에 연자가 떠다녔다. 시커먼 파리떼에 뒤덮인 그 모습이. 

    마침내 지대장이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는 전쟁터다.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남은 건 처형뿐이야. 죽은 몸뚱이는 짐승 밥이 되거나 썩어 가겠지. 구더기나 파리들도 좋아할 테고." 

    정혜는 떨리는 두 손을 감추고자 힘을 주어 꽉 움켜쥐었다. 정혜와 여성들은 이미 연자를 통해 죽음을 목격한 터라 지대장의 말이 허튼 위협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마 사실 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저들은 그 어떤 짓도 벌이고야 말 것이다. 

    "너부터 나와" 

    지대장이 정혜를 가리켰다. 경계병의 총구가 정혜를 밀었고, 정혜는 손끝조차 반항할 수 없었다. 지대장 앞에 선 정혜의 시선이 천막 위 어딘가에 박혔다.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수치심과 공포를 잠시라도 잊게 할 그 어떤 생각이라도. 

    "속옷 내리고 다리 벌려."

    정혜가 떨리는 심정을 누르며 기계적으로 지시에 따랐다. 치마저고리를 헤치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정혜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머리 안에서 지대장의 손끝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아까 본 그 군인이 병기였을까...? 


    지대장이 손가락으로 정혜의 그곳을 벌려가며 눈으로 관찰했다. 이어 면봉을 집어넣어 내부를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정혜는 그 군인의 모습을 그려보고 또 그려보았다. 그럴수록 그 군인이 병기와 똑같다는 확신에 빠져들었다. 비록 그것이 혼자만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병기가 분명해... 정말 병기였을 거야. 그래서 날 여기로 오게 한 거야...


    정혜는 이 순간 결심했다. 

    만약 병기가 아니라면 자신이 선택할 건 죽음밖에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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